과연 진짜는 진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꼭 학교에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저기 선생님? 길 좀 여쭤볼게요.'처럼 길을 묻는 상황에서도 쓰고,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같이 나이가 좀 되어 보이는 어르신들에게 쓰이기도 한다. 식당에서 이모나 삼촌을 찾듯이, 우리는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선생님을 찾는다.
선생님과 비슷한 류의 호칭을 찾아본다면, 사장님이 있겠다. 사장님을 쓰는 맥락도 위의 선생님이 쓰이는 맥락과 다르지 않다. 단지, 조금 더 보편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것 같다.
이처럼 우리는 학교에 몸 담고 있는 교직원도 아니면서, 또는 한 회사의 대표이사도 아니면서 혹자를 선생님이나 사장님으로 부른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학교이지 싶다.
'참 교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기원 역시 분명치 않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한자말 풀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참된 교사이다. 교실에서는 학생을 위해서, 사회에서는 학교에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헌신하는 사람. 정도로 정의해볼 수 있다. (가끔은 동기들끼리 과도한 열정을 지닌 동기를 비꼬는 말이 되기도 하고, 또는 종종 다른 학급에 대한 고려 없이 본인이 속한 학년 혹은 학급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로도 쓰였다. 부끄럽게도.) 그러면 참 교사는 진짜 선생님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진짜, 가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내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진짜 선생님이란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다. 즉, 학생이다. 배우는 자이다. 단지 조건이 있다. 학생들과 함께해야 한다. 홀로만 성장한다면 그는 선생님이기보다는 이론가가 되기 쉽다. 교사는, 이른바 선생님은 그야말로 제1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가장 앞에서 학생들과 대면해야만 하는 이들이며, 그 대면이 그들의 존재의 이유다. 대면을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눈높이가 다른 대면은 대면을 가장한 억압이나 군림이 되기 쉽다. 눈높이를 맞추라는 말은 물리적인 눈의 높이를 맞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짜로, 가짜였다. 내가 조금 더 안다고 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는 했지만, 그들이 진짜 알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정작 알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으며, 교육과정 상 다루지 않는 개념이나 사실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사로 대접받으려고 하면서,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그렇다. 나도 내가 그렇게 닮기 싫어하던 그래서, 내 장래희망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하게 했던 그런 선생님이었다.
매 순간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배우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안에서만 내어주다 보니 어느새 고갈되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형식적인 연수나 승진점수를 위한 연구대회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심사위원 눈에 드는 기술들이었지만, 그것이 곧 학생들을 배우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이러한 의문은 좋은 교사, 좋은 선생님의 자질이 무엇인지, 또 그런 선생님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지도 궁금해졌다. 나는 그래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함께했던 시간은 모두 추억으로 남기고/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