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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Nov 22. 2016

가난

61화

얼마 전에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떤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중략)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책을 읽다가 마지막 의사의 말에 분홍색 포스트잇을 붙였다. 붙이면서 생각했다. 가난이란 놀라운 것이구나. 누군가를 좌절하게도 하며, 생에 집착하게도 하며, 성공시키기도 하고, 위대한 발견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위와 같은 훌륭한 사명감을 가진 의사를 만들기도 하는구나...


독립을 한 후로 일기를 늘 쓰고 싶었다. 일기를 쓰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지쳤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 일상의 매 순간이,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모든 사소한 사건들(여기서 사건이란 모든 종류의 마주침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의 물건도 되고 버스를 타는 일상적인 행위도 된다)이 나에게 새롭게 와 닿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기록할 만 한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그건 카드 결제 예정일 안내문자였다. 나는 뜻하지 않게 스무살 무렵부터 신용카드를 사용해왔는데, 오늘에서야 거의 처음으로, '11월 23일은 이**님의 우리카드 결제일입니다'라는 문장을 두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내일은 신용카드 결제일, 내일은 신용카드 결제일. 그 기분이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아직 말할 수 없지만, 새롭고 즐겁긴 했다.


혼자 있으면 집이 커 보인다. 눈으로 집 안을 꼼꼼히 만져보면서 길이와 부피를 가늠해본다. 나에게 과분한 공간이라고, 얼른 이 집에 어울리는 부지런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귤을 까먹으면서, 이미 본 로맨스를 다시 켜 놓은 채로, 이젠 더 이상 이어폰이 필요없어졌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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