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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Nov 23. 2016

이브에

62화

날이 흐렸다. 오전엔 어머니의 맛난 나물반찬을 먹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하는 벼룩시장을 조금 지키다가 목욕을 다녀왔다. 저녁으로 햄버거를 나눠먹었고, 집에 와서는 선물받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봤다.


가만히 침대에 엎드려서 생각해봤다. 인생은 뭘까. 슬프기만 한 걸까.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춰봤다. 기분이 나아졌다. 거울을 보다가 아까 내가 빨래를 개키며 했던 말이 상처가 되었겠다는 걸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추던 춤을 멈추고 조용히 짐을 챙겼다.


굳이 무언가를 할 때,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고민해보니 그래야만 하는 이유란 건 없다. 언제나 없다. 고등학교 자퇴를 할 때도, 연애를 시작할 때도, 연애를 끝낼 때도, 서점을 차릴 때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란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어버렸을까. 운명일까?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나의 성격이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석연하지 않다. 그랬어야만 하는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단지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가장 강력하고도 무책임한 이유 하나 뿐이었다.


상상해봤다. 지금하는 내 선택으로 인한 미래를.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 미래의 어느 날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사건, 그 날 나의 걸음걸이부터 무슨 음식을 먹을까에 관해, 내 기분과 생각들이 어떨지를, 처음의 낯섦이 사라질때까지 최대한 오래오래 상상해본다. 그러면 문득 미래의 하루가 내 과거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하루씩 준비한다. 하루씩, 하루씩.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약간은 돌이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약속을 해버리거나, 다짐을 해버리거나, 지키지 않으면 부끄럽게 되도록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 지점을 지날 때가 제일 두려운 법이다. 그 지점은 혼자만 지나갈 수 있는 아주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난코스를 지나고 나면 언제나 성장한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살면서 몇 번의 연애를 해왔는데, 헤어질 때마다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만큼 널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거야, 라는 말이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하는 심정으로 힘겹게 헤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 애인도 그 다음 애인도, 언제나 나를 더 많이 사랑해주었다. 때때로 인생이 힘들면 나는 그들을 생각한다.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주었던, 몇 명의 최선을. 내 선택이 최고였던 적은 없었지만, 늘 최선이었음을.


나는 내일 집을 나간다. 혼자서, 혼자의 집으로.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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