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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Jul 06. 2018

가능성

75화

몇 개나 글을 지웠다. 이번엔 잘 쓰려고 하지 않고 그냥 쓰겠다.


오늘 퍼블리 구독메일에서 goalcast 영상을 하나 보내주었고, 평소와 달리 한번 보기로 했다. 제목은 넷플릭스가 인생에 대해 가르쳐 준 것. 며칠 전에 넷플릭스 구독을 해지한 나로서 흥미가 생기는 제목이었다. 다행히 그리 길지 않아 끝까지 한 번에 다 봤다. 거기에 commit 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내용인즉슨, 우리는 금요일 밤에 넷플릭스를 켜서 뭔가 재미있는 걸 봐야겠다고 생각한 후 30분 동안 뭘 볼지 정하지 못하고 피곤해서 그냥 잠드는, 말하자면 너무 많은 선택지 혹은 기회 앞에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는 세대라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나랑 하버드대생이랑 비슷한 게 하나는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도 한 방에 갇히기 싫은 것처럼 아무도 복도에서 살기 싫다고, 우리는 무언가에 어느 것 하나를 경험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 commit라는 단어가 나왔다.


일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괜찮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먹는 동안 넷플릭스로 (....) 프렌즈를 보고 있는데, 챈들러가 모니카에게 청혼하는 에피소드였다. 결혼을 늘 부담스러워하고 결혼이라는 말에 경미한 공황장애(?)를 느끼던 챈들러가 모니카에게, 결혼을 하자고 말할 때. 또 같은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의 20대는, 복도를 정신없이 다니며 온갖 방문을 다 열어제끼는 어설픈 도전의 연속이었다. 때론 문을 여는 게 어려웠지만 그래도 언제나 열고 싶은 문은 다 열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거절을 당한 적도, 있었다. 두드리고 기다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을 기억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은 내가 열고 싶으면 열 수 있었고 그 경험을 하는 데에 지불해야하는 크고 작은 값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직감적으로, 이제 더 이상은 모든 방문을 쉽게 열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려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값의 범위가 더 넓어져야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는 내 생각보다 언제나 더 빨리 들었고, 나는 여전히 정신없이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정신없이 뛰기만 할 뿐, 아무 방문도 쉽게 두드리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영락없이 복도인생행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아마 사라져가는 혹은 잠겨지는 방문을 바라보며, 혹은 생각했던 것과는 언제나 다를 수 밖에 없는 어느 방 안에 갇혀 벽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는 듯 하다.


가능성. 어떤 사람들은 가능성에서 긍정을 보지만 나는 이제 부정을 본다. 가능성이란 언제나 '아닐 수도 있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참 낮은 '될 수도 있다'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걸 '될 것이다'로 바꾸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가능성에서 긍정을 본다는 사람들)은 그걸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애쓴다'고 생각한다. 현실. 내가 자라면서 가장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던 순간은, 내가 가장 어렸을 때, 세상이 너무 무서웠던 바로 그 때였다. 현실은 그 어떤 말로도 포장할 수 없을만큼 냉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될 수도 있는 일보다도 될 수 없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 안 될 가능성을 많이 알수록 될 가능성에 더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이 부정의 에너지가, 나를 북돋우는 힘이 된다. 애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애를 쓰지 않아야 내가 더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정말로 아무 문이나 두드릴 수 없는 나이가 된다. 그건 내 마음에 쏙 드는 방문만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잘 열어줄 문을 찾아 두드린다는 뜻도 아니다. 나에게 잘 열리기도 하고 또 그 안에는 핑크빛 무언가가 선물처럼 놓여있는 방문을 찾아야만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건 내가 두드려야 하는 문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 외엔 누구도 그 문을 두드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그 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commit 해야하는 무언가.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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