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여행의 마지막 날은 이별을 앞둔 연인의 데이트와 같다. 아쉽지만 이미 예정된 결말. 무리하게 연장을 하거나 계획이 틀어지는 일은 없을수록 좋다. 기분은 미묘하거나 시원하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미묘한 쪽이었다. 여행이 짧았기 때문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호텔 베란다의 커튼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강한 조명이 되어 방 안을 비췄다. 너무 밝아서 그 앞에 하나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물 한 병을 따서 마시다가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목이 마르겠네, 생각했다. 여자는 깬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아침 일곱 시면 일어날 때도 된 거 아닌가. 나는 간단히 씻고 나와 퍼질러져 있는 옷가지를 정리했다.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가 유난히 컸는지 여자는 뒤척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왜 안 깨웠어. 나도 방금 일어났는데. 여자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다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은 편안한 흰색이었다. 몇 시야. 일곱 시 반. 나는 그 사이 짐을 다 챙겨 오늘 입을 옷만 거울 앞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몇 시 비행기? 세 신가. 오후 비행기. 여자는 세 가지 질문을 하고는 침대 위를 뒹구르르 뒹구르르 두 번 구르며 이불로 몸을 감쌌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갈래요? 기분이 좋아보였기 때문에 물었다. 어제처럼 가시돋친 분위기였다면 묻지 않았을 거다. 음... 생각해보고. 여자는 이불 속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마저 커튼을 다 열고 베란다로 잠시 나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고 대신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데우는데 여자가 목을 쏙 빼고 다시 말했다. 고기 먹으러 가자. 우리는 미니바에서 물 한 병을 챙겨 들고 마지막 드라이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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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아까 그. 어. 안녕. 호텔 실내 수영장에서 하필이면 물 한 바가지를 들이켠 순간. 남자는 나를 보고 의아한 웃음을 지었다. 낮에 본 사람. 흠,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니까 또 색다르네. 애써 기침도 참고 코 풀고 싶은 것도 꾹 참고, 그냥 새침하게 걸어서 물 마시러 가기. 아니다. 내가 그럴 필요가 있나, 생각하며 새침하지도 안 새침하지도 않게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자리에 가 타월로 몸을 닦고 철푸덕 앉았다. 남자는 나에게 샴페인 한 잔을 가져왔다. 잔을 부딪쳐도 예쁜 소리가 나지 않는, 플라스틱의 투명한 샴페인 잔. 나는 맛있어서 홀짝 홀짝 다 마시곤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얼굴도 작고 눈도 작다. 눈빛이 깨끗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란 직업도 있나? 그럼 뭘 먹고 사는 거지. 이런저런 궁금증을 마음으로만 되새기다가 문득 입에서 나온 질문이란. 어디 사람? 미국. 아. 난 여기 살아. 알아. 대화 끝.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별로 거슬릴 일 없어서 좋긴 했지만 이내 불편해지는 건 나. 그냥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 잠이나 자야겠다, 언제 일어나지, 고민하다가 들려온 말은. 난 내일 가는데. 그래서? 같이 있을래요? 같이 있을래요는 한국말. 나는 잠깐 얼었다가, 남자, 정확히 표현하자면 약간 남자애에 가까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가만히 한 십초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물 두살? 다섯살? 아무튼 그냥 그 눈을 보다가 가만히 말했다. 내가 왜?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알아듣긴 지독하게 잘 알아듣는구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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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방해가 들어온다. 친구는 아닐 거야. 자맨가? 두 여자가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며 앵글 한 쪽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닦고 또 자리를 고쳐 잡고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한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사진 좀 찍고 싶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리나케 도망가는 모습. 덕분에 기가 막힌 노을 사진을 얻었다. 친구도, 자매도 아니었던 두 여자는 그냥 혼자 여행 와서 서로 찍어주던 거구나. 괜히 웃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혼자가 되어 울적해보이는 여자의 뒷모습을 좀 지켜보다가 카메라를 철수하는데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난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인데. 내일이면 가는데. 망설이다가 곧 여자가 가버릴테니까, 다시 말 걸었다. 사진 찍어줄까요? (거절하기 전에) 이 카메라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줄게요. 나 그래도 사진 작간데, 아마추어지만. 저기 서 보세요. 이쪽 보고. 좋아요. 노을이 진 후에도 완전히 어두어지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기에 다행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을까?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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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