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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May 26. 2019

어느

86화

어느 토요일엔 어느덧 가슴팍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자르러 미용실에 갔다. 어느 토요일엔 길고 긴 산책을 했고, 어느 토요일엔 드라이브를 실컷 했다. 그런 토요일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 것 같은 날들. 오늘은 혜화동에 갔다.


1년의 반이 찾아오고 있다. 2019년엔 <점점>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늘 읽고 쓰는 일 가까이에 있어서 허전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래도 이렇게 <점점>을 써보려고 노트북을 펼쳤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거나 글로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가 있거나 글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글을 쓸 때는 거의 순수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경우가 많다. 오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좀 더 순결한 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 의미를 여기 아닌 어딘가에서 발생시키는, 그런 글.


요즘 삶이 좀 느리다. 이건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준다. 시간이 빠르구나, 빠르구나, 벌써, 벌써.. 하는 사이에 죽음은 한순간 찾아올 테니까. 그게 두렵다기보단 인지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시간이 무섭다. 매 호흡을 입출금내역처럼 카운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내 안의 '하루'라는 감각이 느려졌으면. 그리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때때로 내가 그걸 원한다는 사실을 잊는 게 문제다. 때때로는, 시간이 얼른 가버려서 하루가 얼른 끝나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예전엔 삶에 슬픔이 많았던 것 같다. 숲속이 사막보다 습기가 많은 것처럼, 과거의 나의 인생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습한 것을 좋아하니까, 습한 그 슬픔 속을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 숲속을 빠져나와 화창한 햇볕을 향해 걸어가니까 이 건조함이 좋다. 글쎄, 그 때도 너무 충분히 행복했는데 지금 또 더 행복한 것만 같은 이유는 뭘까. 고민해봤는데 당시엔 아마 슬픔 자체를 사랑하진 못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슬픈 나 자신까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슬픔을 사랑하게 되었다. 슬픔은 기쁨과 똑같아서, 끝이 뻔히 보이는 감정의 한 파장일 뿐. 내가 슬픔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슬플 수 있었던 것이 기쁨을 누렸던 것과 비슷한 추억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 나는 이제 슬픔이 좋다. 슬픔이 아무리 좋다해도 기쁨보단 못했던 그 시절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나는 슬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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