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점점

빨리 와요

8화

by Lia

약속 시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는 것을 좋아한다. 기다리는 동안 만날 사람에 대해 생각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면 오래 기다려도 좋다. 지각일 땐 가는 시간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모습일지 어떤 인사를 건넬지. 내가 먼저 도착하면 항상 상대방에게 "천천히 와"하고 말한다. 천천히 오세요. 기다리는 것도 좋으니까.


그런데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하고 한동안은 아무리 빨리 준비를 해도 늦었다. 매번 늦다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버스에서 내리면 뛰어갔다. 그러면 남자친구는 멀리서 뛰어오는 나를 보며 뛰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매번 늦어도 매번 천천히 오라고 해주는 남자친구가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데이트에 거의 먼저 도착하는 편이다. 남자친구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면 기다림에 지칠 일이 없다.


그러다가 며칠 전 만나기로 한 날. 전활 걸어 어디냐고 묻다가 마지막에 "빨리 와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응" 하고 대답했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내가 빨리 오라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말이 천천히 오라는 말보다 훨씬 솔직한 말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기분이 좋아졌고 나는 빨리 기다리고 싶어졌다. 더 오래 기다리고 싶어졌다.


날씨 좋은 가을날. 혼자 있는 시간이 서글퍼지기 십상인 가을. 빨리 오세요. 지금 가요.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