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얼마 전부터 박정현의 "마음으로만" 이라는 노래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 노래는 이민호와 박신혜 주인공의 드라마 상속자들 OST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는 꽤 명작이다. 내가 사랑하면서 외면했던 몇 가지 감정이 잘 드러나 결국 울 수 밖에 없는, 신파 같지만 신파 아닌 드라마였다. 예를 들면 수치심, 자신에 대한 실망감, 무력감 같은 감정.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1화를 좀 봤다. 의외로 담백하고 진지한 이민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했다. 미국에 강제로 유배 간 재벌가의 서자. 망나니 미국인 친구가 '너는 가족들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이민호의 나레이션이 내 어깨를 툭 치는 것 같았다. ㅡ누군가를 원망하기에 나는 너무 게으르다.
누군가를 원망하기엔 너무 게으른. 그게 나였다. 그리고 그건 삶에 대한 의지박약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에 게으른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도 너무 게으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지를 가지는 데엔 원망이 가장 좋은 동력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은 답답한 사람일 것이다.
어제 악스트 2호를 사서 읽었다. 박민규의 인터뷰 밖에 보지 않았지만 그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나도 그동안 혐오에 시달렸다.' 지금 한국에는 ㅇㅇ혐오가 유행이고 어떤 의미에선 다들 부지런히 무언가를 혐오하는구나. 그 사이에 나만 혼자 유행에 뒤쳐졌다. 나는 무언가를 혐오하기에 너무 게으르니까. 게다가 나의 동력은 원망이나 혐오보단 사랑에 더 가깝다. 나를 처음 움직인 것도 차분하고 묵직한 사랑이었다.
이민호의 대사가 왠지 가슴 아픈 건 그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게으르게 사는 방식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원망하지 않는 일만도 너무 시간이 걸려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원망하는 일엔 시간이 많이 든다. 마음은 일분일초가 바쁘다.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면 하루는 금방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빨리 늙어서 애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