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가 다닌 대학은 예대라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이 없거니와 다른 과 학생을 만날 기회도 거의 없었다. 타과 학생을 가장 많이 볼 일은 이학년 때 듣는 예술철학이라는 한 과목 뿐이었다. 거의 백명 가까이 듣는 그 수업은 학부생들이 사용하는 건물에서 멀었다. 걸어가려면 계단이나 가파른 오르막을 가야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학생들에게 견디기 힘든 지옥의 강좌가 되고 말았었는데, 심지어 백명 앞에서 혼자 하는 발표 과제도 있었다. 나는 우리 과 사람이라고는 얼굴이 손톱만 해 보이는 끝자리의 복학생 선배 몇 명과 드문드문 결석한 자리 사이에 보이는 모범생 동기 몇 명 뿐인 그 곳에서 혼자 발표를 해야했다.
당일 아침. 나는 USB에 폴 고갱의 그림 몇 점만 넣어서 들고 갔고, 내 순서가 오지 않을 확률에 한 학기 학점을 걸고 있었다. 발표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잘만하면 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발표 앞 순서 사람들이 죄다 결석/지각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내가 발표를 해야했다. 나는 단지 출석했다는 이유만으로 발표준비가 완벽히 된 학생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앞으로 나갔다. 일전에 언급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얼마나 재밌고 위대한 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되는 발표였다. 마이크를 들고 나는 PPT도 없이, 내 뒤 스크린의 윈도우 바탕화면만 겨우 가려놓고 발표를 했다. 끝나자마자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으로 자리에 돌아왔을 때, 옆자리에서 쪽지가 왔다. 내용인즉슨 아까 교수가 억지로 질문시켜서 질문했던 서양화과 누구인데 발표 잘 들었고 친해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유인나가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읽었다. 오늘 똑같은 아이템(기억안남)을 버스에서 보고 약간 설레고 기대했는데 주인이 같은 여자여서 무척 실망했다는 사연이었다. 다 읽자마자 유인나는 왜 동성친구의 인연은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동성 간에도 친해질 계기가 있을텐데.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있고 다가가고 싶은 스타일도 있는 법인데 모두들 그렇게 잘 하지 않는다. 사실 연인이 되려고 하는 사이야말로 가볍게 다가가도 괜찮지 않나? 친구야말로 더욱 운명적이고 신중하게 사귀어야하는 게 아닌가! 친구는 되고 싶어서 되는 경우가 적은 건가?
결과적으로 나는 그 서양화과 아가씨와 친구가 됐고 그녀는 내 대학시절 유일한 친구로 남아있다. 나와는 정말 다른 종류의 아가씨로 그녀는 화장도 잘하고 패셔너블하다. 또 맛집을 좋아하고 몸매도 육감적이다. 성격도 나보다 훨씬 활발하고 솔직한 데다가 많은 일에 도전하기를 즐기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또 열심히 산다. 게다가 친구도 많다. 나는 완전히 반대다. 나는 민낯에 편한 옷차림, 맛집 문외한에 마른 몸, 조용하고 진지한 성격에 한 가지 일에도 도전하기 벅찰 정도로 게으름. 게다가 친구도 별로 없다. 서점오픈을 준비하면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는 정반대인 그녀 덕분에 내 세계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모른다. 더불어 내 마음도 넓어졌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사용한다. 우리는 만나면 영혼없는 수다를 떨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정말 좋다! 우리는 재미있는 친구 사이다.
점점.
추신. 22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나와 인연이 깊은 숫자다. 내가 앞으로 만 회를 연재한다해도 22라는 회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단 한 번 뿐인 오늘에 진심으로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