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일기를 쓰지 않은 날 중에도 기억에 남는 날들이 있다. 어제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쉽게 깨질 수 없는 정해진 관계(예를 들면 가족, 친지, 스승과 제자, 연인같은)가 그 관계의 이름 안에만 머무는 게 싫다. 더 정확히는 피상적인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 싫다. 가깝거나 먼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자체의 방향성이 문제인 것 같다. 부모와 자식이라고해서 부모는 부모의 역할에만 자식은 자식의 역할에만 자신을 가두면 그 관계는 답답해진다. 연인관계도 마찬가지다. 꼭 연인으로서의 서로만 볼 수는 없는 법. 언제는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기도 하고 언제는 적당히 거리를 두기도 하는, 그런 게 좋다. 서로의 한쪽 면만 바라보고서는 더 행복해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나야말로 그게 참 어려운 사람이다.
살면서 참 피상적으로 생각해 온 것들이 많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더 심하다. 그냥 부모로만 부모를 보고, 친구를 정해놓은 거리 밖에서만 만나고, 연인을 연인이란 이름 안에 가뒀다. 잠깐 만나는 사람도 잠깐 만난다는 그 우연성에 여러가지 가능성을 다 지워버리고 대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는 그들 모두와 더 나은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좀 더 그들의 마음 속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예전엔 몰라서 못했다지만 지금은 내가 그럴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어떤 친구 얼굴이 눈에 밟혀도, 내 표정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순수하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할까봐, 내 말이 걱정을 더하는 게 될까봐 하는 핑계같은 배려로 나는 많은 것들을 무심하게 흘려보낸다. 이런 식으로 내가 더 편해지긴 하지만 더 행복해지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균형이 제일 중요하겠지.
어제는 정말 즐겁고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하루였다. 마음이 깊이 박힌 장면들이 많다. 사진처럼 박힌 모든 모습을 자주 꺼내어 닳을 때까지 만질 거다.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