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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Jul 16. 2015

우장 없이, 동네 산책

남자친구의 첫사랑이 살던 곳

얼마 전,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신기한 기억이 났다. 그 날, 남자친구와 함께 차 안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첫사랑이 살던 동네에 가기로 했다. 실은 내가 가자고 졸랐다. 순간적으로 그 곳에 어찌나 가고싶던지, 진심이었다. 잠실 근처였다. 그는 동네 이름을 정확하게 몰라서 내가 아파트 이름으로 검색했다. 한 구 안에 그 아파트만 네 개였다. 몇 번 경로를 바꾸어 그에게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들과 비슷한 아파트를 찾아 갔다.


조용하고 푸르른 대로변을 따라 쭉 직진을 하다가 우회전을 했다. 서울답지 않게 분위기가 오묘한 동네였다. 그녀가 살던 곳은 좁은 간격으로 스무 개 정도 되는 동이 모인 아파트단지였다. 아파트는 키가 작았다. 남자친구는 아파트 입구를 보더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담벼락이 내 키보다 낮았고, 풀과 나무가 많았다. 나는 주차를 하자마자 차에서 내려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경비아저씨가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간간이 쓰레기를 버리러 아주머니들이 왔다가 갔다. 우리는 주차해 놓은 곳 옆에 있는 놀이터로 올라가 그네를 탔다. 그네가 오를 땐 하늘이 보였고, 내려올 땐 아파트 베란다에 널려있는 이불, 먼지가 새카맣게 내려앉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보였다. 거기서 엄마가 나를 부르며 이제 들어와, 하고 말할 것 같았다.


그 동네는 건물이 드문드문 있었다. 아직 동네 한의원과 동물병원이 있었고, 코너를 돌면 비디오와 만화대여점이 있었다. 만원에 만이천원을 적립해주는. 그 길을 따라 쭉 내려오니 사거리였고, 사거리 건너엔 스타벅스가 있었다. 거리엔 사람이 적었는데, 스타벅스 안에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어린 부부와 젊은이들과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싶으신 나이든 분들까지 손님이 아주 많았다. 나는 원래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인 양 소파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구름이 끼어 흐린 초저녁이었다.


갑자기 행복했다. 즐거웠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니 생각만큼 내가 예쁘지 않아서 우울해질 뻔 했는데도 우울해지지 않고,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군가의 첫사랑이 살던 동네라고 한다면 바로 그 동네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거긴 부자들이 사는 것 같은 번지르르함도, 낭만적인 카페나 랜드마크같은 건물도 없었다. 그러나 운치가 있었다. 그 운치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네를 타면서 남자친구의 옛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스무살, 스물한살, 스물두살의 남자친구와 같은 나이의 어떤 여자아이가 놀이터에서 달콤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심한 말다툼을 했던 이야기들은 그 나이의 나와 비슷했겠지. 어쨌든 놀이터는 그대로 남아 이제 다른 연인들의 밤을 지켜주고 있을 테고.


앳된 시절. 대담하고 겁이 없어 잘못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린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지나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은 후엔, 더욱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지나치게 되었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다정스러운 일인지, 넌 모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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