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이폰이 맛이 갔다. 배터리가 44% 남아있는데도 곧잘 꺼진다. 그리고는 다시 켜지지 않는다. 리퍼 기간이 하루 남아서 서비스센터에 갔더니 친절하지만 피곤해 보이는 엔지니어님이 두 가지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 사고 나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한 번도 안 하신 것 같은데 소프트웨어가 문제가 매우 많다! 나를 나무라셨다. 두 번째. 어떤 부속품이 알루미늄이라 온도에 예민해서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우면 가끔씩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했다. 다른 문제도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증상은 계속된다. 아마도 두 번째 문제가 큰 것 같다. 따뜻한 카페에서 실컷 이야기하고 떠들다가 주머니에 집어넣고 지하철 역까지 15분 정도 걸어가서, 지하철 탔으니까 뭐라도 볼까 싶어 꺼내면 그때 꺼진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이폰. 어쩐지 안쓰러워서 나는 두 손으로 꼭 쥐고 입김을 불어준다. 켜지진 않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읽지 않고 있으니 갑자기 쓸 거리가 엄청 떠오른다. 하지만 메모장이라곤 휴대폰 메모장뿐이다. 녹음도 할 수 없고. 이걸 어쩐다 하다가 가방을 뒤져서 작은 펜을 찾았다. 아무 영수증에나 적어야지, 하고 가방에 수집하고 있는 영수증 중에 하나를 꺼냈다.
영수증엔 '추후 적립'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는데, 영수 내용은 흑색이 다 날아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눈을 크게 뜨고 보니까 세상에나 무려 이 년 전 영수증이다. 내가 2년 동안 가방 정리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심했다. 우연히 아침에 책장에서 꺼낸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1>에 꽂혀있던 영수증이다. 이 년 전 어느 날씨 좋은 오월에 홍익 문고에서 샀었다. 남자 주인공이 심히 어리석고 순수한 소설이다. 왠지 그 날의 어리고 신이 난 내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뒷장에 무언가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서점에 오는 손님들에게 드리는 편지, 읽어볼 책들, 할 일들. 손으로 하나씩 쓰다 보니 영수증이 너무 소중해서 사진으로 찍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폰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영수증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내 눈에 담는다. 믿을만한 기억력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영수증도 가방에 다시 잘 넣어두고.
다시 차가운 밤길을 한참 걸어서 집에 도착. 아이폰을 충전시키면, 배터리가 없다고 했던 아이폰은 켜지자마자 44%로 돌아와 있다. 나는 왠지 배터리 부자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영수증을 꺼내서 읽어본다. 무언가가 고장 난다는 건 참 재밌다. 항상 무언가가 고장 났으면 좋겠다.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