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시각적인 자극에 시달리고 있다. 책도 시각적인 자극이다. 모든 게 시각적인 자극이다. 요 근래 계속 바다가 보고 싶다. 로스트를 봐서 그런지, 바다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반복되어 온 파도의 꾸준함을 보고 싶다. 하늘과 바다. 그 두 개만 있으면 나는 어디서든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다.
며칠 전에 엄마가 나를 보고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엄청난 걱정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있다고 했더니 엄마가 내 걱정을 맞춰보겠다고 했다. 엄만 헛다리만 짚었고, 나는 내 걱정을 말로 해보는 것만으로 훨씬 덜었다. 우리는 그닥 잘 통하는 모녀가 아니지만, 사이가 좋은 것 같다.
어젯밤엔 진하게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키스가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든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교감한다는 건 마치 목소리가 거세된 듯한 불행같은 느낌인 것이다. 하지만 잠은 매우 잘 잤고, 오후가 되어서야 그런 꿈을 꿨다는 게 기억났고, 기분이 좋아졌다. 키스란 그렇게 좋은 거다.
며칠 째 습기만 가득한 서울이다.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내리면 좋을 텐데, 날씨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습기찬 어제도 운동을 다녀왔다. 어제는 운동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을 깨달았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운동은 런닝머신이다. 야외에서는 대여섯시간이라도 구두신고 걸을 수 있는데, 이상하게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하면 십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시간 흘러가는 계기판만 뚫어져라 보다가 힘이 빠져서 눈을 감아버린다. 재밌는 점은 그냥 길을 걸을 땐 눈을 감아도 휘청거리지 않는데, 런닝머신 위에서는 눈을 감으면 곧장 스텝이 엉킨다는 거다. 그래서 양 옆에 손을 가볍게 얹어야만 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는 지금 9%정도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이 길은 조용하고 어두운 주택가이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만 밝은 곳은 그 아래 뿐이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나무 그림자가 나를 놀래킨다. 그렇게 걸어가야한다. 7분 정도 쉬지 않고, 720m를. 거기까지 가면 예쁜 카페가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있어서 창밖 풍경에 지붕이나 옥상이 많이 있는 카페. 시원하고 향이 멋진 음료수를 파는 곳.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억지로라도 열심히 걸어가는 거다.
한참 왔구나, 싶어 눈 뜨면 눈 앞에 보이는 겨우 런닝머신 계기판이라는 게 좀 충격이다. 아, 여긴 부암동이 아니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린다. 그 동안 몸이 좀 따뜻해졌고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됐다.
그렇게 땀에 젖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나의 일상의 연약한 울타리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