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점점

아스피린

55화

by Lia

키 작은 사람은 작은 가방을 들어야 키가 덜 작아보인다. 작은 가방에는 지갑, 휴대폰, 립스틱 하나, 고양이밥 하나, 그리고 공진단 통이 하나 있다. 공진단 통은 금색 원통형으로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 짧고 지름이 2cm정도이다. 그 안에는 공진단이 아니라, 약 스무 알 정도의 아스피린이 들어있다.


맷집이 세다고 할까, 통각이 둔하다고 할까. 매운 것도 잘 먹고 어디가 아파도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이다. 견딜 만 하냐고 하면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하고 만일 내가 아파 죽는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나는 견딜 만 하다고 생각할 거다. 이토록 아픔에 무감각하니 아파도 싸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고통 중에서 내가 못 참는 것은 꼭 하나인데 바로 두통이다.


처음 두통이란 걸 느꼈을 때가 생각난다. 양 머리에서 종이 계속 울려대고 눈이 지끈거렸다. 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편도가 부은 게 아니었다. 감기기운도 아니고 소화불량도 아니었다. 두통! 두개골을 망치로 시원하게 깨버리면 딱 좋을 것 같은 두통. 나는 지체없이 바로 아스피린을 두 알 먹었다.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을 위해 재빨랐던 때가 아닌가 싶다.


아스피린을 먹고 나서 삼십 분 쯤 지났을까. 나는 씻은 듯이 낫는다는 걸 처음 느꼈다. 마치 두개골을 꺼내서 물로 아프게 한 병균을 깨끗이 씻어내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소중하게 닦아서 햇볕에 살짝 건조까지 시킨 완벽한 개운함이었다. 사실 어느 부위가 아파 약을 먹더라도 왠지 약 기운과 내 아픈 기운이 남아 기분이 찝찝한데, 아스피린은 그렇지 않았던 거다.


그 후로 나는 두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두통 그 자체가 아니라, 두통을 겪을까봐 하는 불안감이었다. 정말로 아픈 경험을 하면 그것은 곧장 나를 변화시킨다. 마치 아는 길을 찾아가듯이 분명한 행동으로 변화한다. 나는 아스피린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유용하게 아스피린을 사용할 때도 있었다. (비행기 멀미가 너무 심했던 날, 감기기운이 생겼던 날)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아스피린을 들고 다니기만 했다. 짐을 점점 더 덜어내도, 아스피린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나는 약을 많이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약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었다. 의술이나 의약보다는 나의 자가면역을 더 신뢰했던 탓이다. 아스피린을 들고 다님으로서 겨우 문명인이 되었다고 할까?


미드나 영화에서 에스피린, 이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나는 가만히 흐뭇해한다. 나에게도 있지, 아스피린. 내 불안을 덜어주는 나의 두통약.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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