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따뜻함으로

- 작은 아이가 나를 위로한다.

by 이아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을 재우는 것은 대부분 나의 몫이었다. 엄마와 함께 잠드는 규칙이 깨진 것은 요 근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다. 아이들과 함께 잠에 든 지 오래됐다고 생각했던 날, 괜스레 미안함이 올라와 아이들과 함께 자기 위해 들어갔다.


올해 들어 네 살이 된 둘째가 엄마와 함께 자서 기분 좋은 티를 그렇게 냈다. 엄마와 함께 잠드는 시간이 소중했던 거겠지. 그런 둘째의 마음이 다음날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로 둘째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랑 무슨 놀이하고 놀 거야?"



아직 말이 서툴긴 해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둘째가 답이 없었다. 한참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둘째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엄마랑 놀고 싶지 않아?"



이번에도 둘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속상함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답하지 않는 이유 혹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 끝에 도달한 곳은 미안함이었다. 둘째와 신나게 놀았던 순간들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혹시 엄마랑 무슨 놀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응! 몰라!"



아이는 그저 '어떤'놀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에 집중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함에 도달한 나의 생각들이 미안한 이유를 이리저리 찾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함께 즐거웠던 기억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결국 모든 생각은 죄책감으로 귀결되었으며 아이 앞에서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항상 부족하다고는 느끼긴 했다. 첫째에 비해 둘째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아이가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하였다.


고인 나의 눈물을 아이는 보았다. 나의 눈물이 아이에게 죄책감이 될까 하염없이 울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고인 눈물만으로 끝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고인 눈물을 닦아주는 건 작디작은 손이었다. 단지, 엄마의 눈물이 속상하여 닦아줄 뿐인 아이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일은 엄마랑 신나게 공룡놀이 할까? 아니면 공놀이할까? ”



“ 둘 다! 공룡놀이도 하고 공놀이도 할래!"



나의 눈물을 향한 아이의 슬픔은 그저 엄마가 속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이유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슬픔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어쩌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슬픔이 아이에게 묻어갈까 염려할 필요조차 없도록 부지불식간에 따뜻한 마음으로 변하는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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