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손보면 된다는 말

그래도 사운드

by 정이안

사운드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은 대개 아주 다정한 얼굴을 하고 온다.
메일의 문장 끝에는 웃는 표시가 붙어 있고, 메신저에는 느낌표가 두 개쯤 달려 있다.
가끔은 전화기 너머 목소리도 밝다.
“진짜 큰 작업은 아니고요.”
“거의 다 됐는데요.”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허리를 한 번 펴게 된다.
몸이 먼저 안다.
아, 이제 곧 오래 앉아 있어야겠구나.


조금만 손보면 된다는 말은 묘하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부탁처럼 들리는데, 막상 파일을 열어보면 제일 큰 체념이 필요할 때가 많다.
작은 상처라고 해서 덜 아픈 게 아니듯, 작은 수정이라고 해서 작은 노동은 아니다.
오히려 다 망가진 것은 포기라도 쉽다.
그런데 거의 괜찮은데 어딘가 계속 거슬리는 소리, 바로 그게 사람을 오래 붙잡아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배우의 대사는 잘 들리는데 입 안쪽에서 한 번씩 굴러나오는 침 소리가 있다.
한 문장만 보면 별일 아니다.
그런데 그 문장이 한 편의 영화 안에 수십 번, 수백 번 이어져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 오는 장면이라 빗소리가 필요한데, 현장에서 받은 소리에는 비보다 발전기 소리가 더 크다.
실내 장면인데 에어컨 바람이 계속 마이크를 문지른다.
감독은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은 장면이기 때문에, 이 테이크를 꼭 쓰고 싶다고 한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좋은 표정은 다시 찍을 수 없고, 시각 정보는 중요한거니까!
그런데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만 손보면 된다는 말 속에는 늘 누군가의 생략이 숨어 있다.
촬영이 급했고, 예산이 없었고, 현장이 정신없었고, 옆 팀이 바빴고, 날씨가 협조하지 않았고,

배우의 컨디션이 안 좋았고, 장소 섭외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버스가 지나갔고, 비행기가 날아갔고, 아이가 울었고, 누가 발로 케이블을 건드렸다.


영화 현장에는 그런 일들이 무수히 있다.
누구 하나 일부러 망치려고 한 것도 아니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허덕이며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파일이 내 컴퓨터로 들어오는 순간, 그 무수한 사정은 몇 마디들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여기 대사만 조금 정리하면 될 것 같고요.”
“노이즈만 조금 빼주시면 될 것 같고요.”
“발소리만 조금 추가하면 될 것 같아요.”
“공간감만 조금 맞추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 말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말이 너무 정확하지 않아서 괴롭다.
조금이란 얼마일까.
한 시간일까, 하루일까, 사흘 밤일까.
귀가 멍해져서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에도 리버브가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까지를 조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우스를 쥔 손목이 먼저 작업 시작음을 기억하는 상태,

배우의 숨소리만 듣고도 어느 장면 몇 테이크인지 어렴풋이 맞힐 수 있게 되는 상태,

오디오 파형을 보기만 해도 ‘아 여긴 옷깃 스쳤네’ 하고 알게 되는 상태.

그런 상태까지 가도 사람들은 말한다.

'조금만.'


가끔은 이런 사실이 재미있다.
정말로 세상에는 ‘조금만 손보면 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란게.


사람이 사람의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들이 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문장만 좀 다듬으면 되겠네요”라는 말이 있을 것이고,
디자이너에게는 “로고만 하나 툭 넣으면 되죠?” 같은 말이 있을 것이다.


사운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조금만 손보면” 이다.
눈에 안 보이는 일은 늘 조금으로 취급된다.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큰일처럼 보이지 않거나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런데 나는 또 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일을 쉽게 말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직업 앞에서 너무 천진하게, 너무 무지하게, 너무 가볍게 굴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수고를 얇게 상상한다.
나는 그 얇음을 미워하기보다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목격할수록 조금 슬퍼진다.


사운드는 늘 뒤에 온다.
카메라가 먼저 있고, 배우가 먼저 있고, 조명이 먼저 있고,

미술이 먼저 있고, 편집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는다.

그다음에야 누군가 말한다.
이제 소리 좀 붙이자.
그때 이미 제작진들은 예산도 시간도 인내심도 많이 써버린 뒤다.
그러니 사운드 차례가 되었을 때 남는 말은 자주 이런 식이다.

“여기까진 다 됐고요.”
“정말 조금만 손보면 되고요.”
“최대한 빠르게 가능할까요?”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늘 재봉업을 떠올린다.
옷이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여도 마지막 단추 하나,

끝단 몇 센티미터, 접히는 선 하나가 전체 인상을 바꾼다.
그런데 바느질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마지막이 어렵다는 것을.
비뚤어진 걸 곧게 만드는 일은 새로 만드는 일과는 다른 종류의 기술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미 있는 것을 망치지 않으면서 고쳐야 하고,

티 나지 않게 손봐야 하고, 가장 애쓴 흔적이 가장 안 보이게 끝나야 한다는 것을.


사운드도 자주 그렇다.
좋은 사운드 작업은 티가 많이 안 난다.
관객이 “와, 이 장면의 대사 노이즈 제거 정말 훌륭하네” 하고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아무 불편 없이 몰입한다. 원본 소스가 어떤지를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울어야 할 장면에서 울고, 긴장해야 할 장면에서 긴장한다.
그게 사운드가 제 일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제 일을 잘한 사운드는 종종 존재를 증명하기 어렵다.
안 거슬렸다는 사실은 칭찬이 잘 되지 않는다.
문제가 없었다는 감상은, 문제를 지우느라 들인 노동을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사운드 하는 사람들은 가끔 유령 같다고 생각한다.
분명 있었는데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열심히 했는데 흔적이 적다.
제일 공들인 부분이 제일 자연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원래 그랬던 줄 안다.
그 자연스러움을 만드는 데 든 시간이 얼마나 인공적이고 집요하고 반복적이었는지는 모른 채.


어느 날은 정말 우스웠다.
“이 장면에서 잡음만 조금 빼주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 파일을 열었는데,

그냥 잡음이 아니라 거의 생활 ASMR 소리들이 들어가 있었다.

냉장고, 자동차, 형광등, 바람, 옷깃, 멀리서 웃는 사람들, 발소리, 방의 울림, 어색한 침묵,

지워지지 않는 현장의 소음들.


나는 그걸 들으며 생각했다.
아,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소리 속에서 살고 있구나.
그리고 영화 사운드는 그 많은 소리 중에서 필요한 것만 남기려는 예술이구나.


필요한 것만 남긴다는 말은 실은 아름답고 잔인하다.
무언가를 남기려면 다른 무언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의 목소리를 살리기 위해 배경을 덜어내고,

장면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생활의 잡음을 줄이고,

감정의 선명함을 위해 현실의 두께를 깎아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렇게 깎아낸 뒤에야 사람들은 “현실 같다”고 느낀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쌓여 있을 때보다, 잘 정리되었을 때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현실은 현실과 닮은 가공품이다.
나는 그 가공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니 “조금만 손보면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정말 손을 대는 일이다.
칼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건물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다.
손본다.
정리하고, 맞추고, 깎고, 메우고, 연결한다.
그런데 손으로 하는 일은 원래 오래 걸린다.
손에는 속도가 없고 대신 감각이 있다.
감각은 언제나 시간이 든다.


조금만 손보면 된다는 말.
그 말의 실제 뜻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당신의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당신의 귀가 좀 필요합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해온 반복과 실패와 집착이 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확한 말로 부르지 못해서, 그냥 ‘조금만’이라고 말할 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덜 서운하다.
조금만이라는 말이 노동을 축소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명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기술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짧게 말할 수밖에 없다.
짧게 말하다 보니 가벼워지는 것이다.

물론 가벼워진 말만큼 사람을 가볍게 취급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내 일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려고 한다.
정리라고 하고, 복원이라고 하고, 편집이라고 하고, 설계라고 하고,

믹싱이라고 하고, 때로는 구조를 다시 세우는 일이라고도 한다.
‘조금만 손보는’ 게 아니라, 장면이 버틸 수 있도록 소리의 바닥을 다시 까는 일이라고.
그러나 말을 정확히 하면 할수록 깐깐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그래도 결국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를 짓게 된다.
새벽에 끝낸 파일을 보내고 나면 몸은 축 늘어져 있는데, 영화 속 장면은 훨씬 또렷해져 있다.
배우의 숨이 살아 있고, 문 여는 소리가 장면의 타이밍과 맞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음악이 대사를 덮지 않고,

관객이 집중해야 할 순간이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안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조금’이었지만, 나에게는 꽉 찬 하루였다는 것을.


하루가 쌓여 업이 된다.
남이 대충 부르는 이름을 내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동안, 그 일은 내 것이 된다.

아직도 파형을 보고, 아직도 잡음을 지우고, 아직도 잘 안 들리는 한 음절 때문에 몇 번이고 되감는다.
그런데 그 반복 속에서만 생기는 애정도 있다.
남들은 놓치는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게 되는 애정.
보이지 않는 일을 끝내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하는 애정.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 말을 계속 들을 것이다.


“조금만 손보면 돼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네, 보내주세요.

다만 속으로는 안다.
조금이라는 말은 늘 사람을 속인다.
그런데 또 그 조금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주 선명하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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