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완무시, 이유 없는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by 서모니카

작년 생일, 나는 삿포로로 떠났다.
내 생일은 크리스마스 직전이라, 어릴 때부터 생일 파티는 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묻혀 버리곤 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그 생일 파티마저도 잘 하지 않게 됐다. 남자친구마저 없으면, 생일이라고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해 생일 직전에 썸이 말 그대로 ‘와장창’ 붕괴됐다. 마음은 그냥 툭 치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그렇게 멘탈이 흔들리는 상태로 생일을 혼자 보내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계절 탓일까, 눈 덮인 도시에서 흰 눈을 보며 멍하니 걷는 상상을 했다.


인터넷 서치를 좀 해보니 삿포로가 딱이었다. 한국에서 멀지도 않고,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아니까 여행 스트레스도 덜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병률 작가의 유명한 문장,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대학생 때부터 달달 외우던, 일명 ‘이병률 키즈’였던 나에게 삿포로는 일종의 로망 같은 곳이었다.


결국 왕복 항공권을 결제했다. 12월 말 삿포로는 성수기라 비행기값만 100만 원 가까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망설였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나라도 나를 챙겨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일정 중 하루는 조잔케이의 고급 료칸 호텔까지 예약했다. 혼자 일본 여행을 갈 때는 보통 비즈니스 호텔만 잡았는데 이번엔 과감히 ‘나를 위한 사치’를 부렸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좀 무리했었다.)


생일 당일에는 삿포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통창 뷰 스시 전문점에 오마카세 점심 코스도 예약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니 여행이 너무 기대됐다. 생일을 혼자 보내야 한다는 우울감을 여행에 대한 설렘이 잡아먹어 버렸다!


삿포로 여행은 기대한 만큼 멋졌다. 특히 생일 점심으로 찾아간 오마카세 스시집은 최고였다.


카운터 석에 앉자 따뜻한 물수건과 차가 나왔다. 곧이어 신선한 샐러드와 색이 고운 차완무시가 나왔다. 일본식 계란찜인 차완무시는 혀끝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풀어졌다. 밖에서 매서운 삿포로 겨울바람을 맞고 들어와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나는 차완무시 한 그릇을 거의 들이마시다시피 후루룩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본 스시 장인 셋이 동시에 웃었다. 내 담당 셰프가 “차완무시 좋아하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얼른 고개를 대차게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트기 시작했다. 셰프는 내게 왜 이 겨울에 홀로 삿포로에 왔는지 물었고, 나는 생일 기념으로 나홀로 여행을 왔노라고 답했다. 그는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차완무시, 한 그릇 더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또 끄덕였다.


잠시 후 나온 두 번째 차완무시는 더 맛있었다. 같은 레시피일 텐데, 생일 선물처럼 받은 그 다정함 때문인지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원래 공짜 음식은 더 맛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날은 심지어 서비스 스시까지 얹어주셨다.


내가 생일 선물로 서비스 스시를 받을 때, 가게 직원들은 물론이고 옆자리 손님들도 박수까지 쳐가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다정함을 한껏 받은 날이었다.


이런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 여행을 자주 가게 된 것도 사실은 이런 다정함 때문이다.

몇 년 전, 아키타현 노시로 시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혼자 오코노미야키를 먹고 계산하려는데, 옆자리 손님이 내 몫까지 계산해둔 걸 알게 됐다. 이유를 묻자 그분은 “외국인이 여기까지 와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는 오히려 “나는 별거 안 했는데 이렇게 기뻐해줘서 신기하다”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일본 여행에 더 자주 가게 됐다. 물론 그간 불친절한 사람도 있었고, 마음 상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떠올렸다. 나에게 이유 없는 다정함을 베풀던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흐릿하지만, 그때의 온기는 내 ‘일본’이라는 세계를 지키는 ‘가드’가 됐다.


그런 다정함을 받다 보니, 나도 이 다정함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게 그랬듯, 나도 누군가의 세계관을 조금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조금 더 다정하려고 노력한다. 길을 물으면 최대한 친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간단한 통역 쯤은 언제든 나서주고, 눈이 마주치면 웃어준다. 정말 심플하다. 별것 아닌 행동이지만, 어쩌면 그들의 마음 속 ‘한국’이라는 세계관을 결정짓는 순간일 수도 있다.


데일 카네기는 '아마도 오늘 당신이 한 다정한 말을 당신은 내일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은 그 말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의도 없는 다정함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하루를 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나라를 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을 구한다.


작년 삿포로에서 내가 받은 차완무시 한 그릇은 그런 의미에서 내 작은 세상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한 층 두껍게 만들어줬다. 이유 없고 대가 없는 다정함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덥히는 사람. 세상은 아마 그런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구원될 것이다.


<다정함이 가득한 차완무시 레시피>

-볼에 달걀을 2개를 풀고, 가쓰오부시 또는 다시마로 낸 국물 한 컵, 간장 1작은술, 맛술 1작은술, 소금을 한꼬집을 넣어 잘 섞는다. 체에 한 번 걸러주면 훨씬 부드럽다.

-작은 찜기용 컵에 새우나 버섯 등 원하는 재료를 넣고 계란물을 부어준다.

-찜기나 냄비에서 약불로 12~15분 정도 쪄낸다.

-젓가락으로 찔렀을 때 맑은 국물이 나오면 완성이다.

-마무리로 새우나 표고버섯 슬라이스, 어묵을 살짝 올리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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