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털 볶음밥, 모든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맛

by 서모니카

퇴근 후 마트에 들렀다가 마감 세일 코너를 발견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장바구니를 든다. 한참 다운된 가격표가 덕지덕지 붙은 채소들을 보면 괜히 안 사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들거든. 그렇게 그날 필요도 없는 대파 반 단, 아직은 싱싱한 시금치 한 봉지, 단호박 반통을 반값에 데려온다.


문제는 계획 없이 사온 이 아이들이 냉장고 안에서 차례차례 시들어간다는 거다. 한숨 쉬면서 ‘또 버릴 걸 돈 주고 사온 건가…’ 고민하다가 찾은 방법이 ‘냉털 볶음밥 데이’. 냉장고 채소 칸이 반 이상 차면 무조건 냉털 볶음밥을 만들어 먹기로 스스로 정한 거다.


냉털 메뉴는 말 그대로 냉장고 탈탈 털어서 만드는 요리. 그중 가장 쉽고, 만들고 나면 왠지 성취감까지 주는 게 바로 냉털 볶음밥이다.


냉털 볶음밥의 매력은 예상 불가라는 데 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를 맞이하는 재료는 매번 다르다. 오늘은 당근·양파·감자 같은 무난한 볶음밥 3대장일 수도 있고, 어떤 날은 마감 세일 때 괜히 집어온 레디쉬, 방울토마토, 미나리, 단호박, 심지어 마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럴 땐 약간의 모험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게 또 재미다. 냉털 볶음밥의 묘미는 이질적인 재료들을 최대한 잘게 다져서, 센 불에서 빠르게 볶고, 마지막에 어울리는 소스 한 숟갈로 맛을 확 잡아주는 데 있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조합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박’이 터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냉털 볶음밥은 그린빈, 미나리, 명란젓 조합이다. 그린빈은 식감 담당, 미나리는 향 담당, 명란젓은… 글쎄, 본드 같은 역할?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재료들을 기막히게 하나로 묶어준다. 명란젓을 해체(?)해서 볶아주면 짜고 강한 맛이 전체적으로 덮여 그보다 약한 맛들은 자연스럽게 묻히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 조합이 또 진짜 맛있다.


내 이력서도 냉털 볶음밥 같다. 아이돌 지망생, 카페 매니저, 언론정보학 전공 후 기자, 광고기획자, 유튜버까지. 서로 전혀 상관없는 이력들이 나를 만들었다. 사실 한 때는 그게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 남들은 한 길을 진득하게 파는데, 나는 자꾸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안다. 이 조합들이 모여야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다는 걸. 그리고 그걸 잘 엮어주는 ‘명란젓’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 나한텐 그게 경험에서 비롯된 인사이트와 기획력이었다.


취준생들이나 이직 준비하는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자기 경력이 일관성이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그것도 냉털 볶음밥이야.”


버려지는 건 하나도 없다. 어떤 재료도 잘 다져 넣으면 맛을 낸다. 중요한 건 그걸 조화롭게 섞어주는 소스를 찾는 일이다. 그게 공부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다.


냉털 볶음밥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분명하다. 모든 재료는 다 개성과 쓰임이 있고, 조합하면 결국 멋진 맛을 낸다는 것. 오늘 냉장고 안에서 꺼낸 식재료가 어울릴지 안 어울릴지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일단 꺼내서 썰고, 볶고, 소스를 넣어보자. 인생도 비슷하지 않나.


<낯설어도 맛있다고, 최애 조합 냉털 볶음밥 레시피>

-그린빈은 1~2cm 길이로 자르고, 미나리는 3~4cm 길이로 썬다. 양파는 잘게 다진다.

-명란젓은 껍질에 살짝 칼집을 내어 속알만 긁어낸다. (껍질은 버리지 말고 나중에 살짝 볶아도 풍미를 살릴 수 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중불로 달군 뒤 양파부터 볶다가, 달달한 향이 올라오면 그린빈을 넣어 아삭아삭할 정도까지만 볶는다.

-밥 1공기를 넣고 센 불에서 모든 재료를 재빠르게 볶아준다.

-불을 살짝 줄이고 명란젓을 넣어 밥에 골고루 섞는다. 간장 1큰술, 소금·후추 약간으로 간을 맞춘다. (명란젓이 이미 짜기 때문에 소금은 아주 조금만 넣기!)

-달걀을 풀어 팬에 둘러 넣고, 밥과 빠르게 섞어가며 볶아서 밥알을 달걀로 코팅해준다.

-불을 끄기 직전에 미나리를 넣어 잔열로만 살짝 숨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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