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멀리보다,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의 정직함을 믿으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이 길을 지워버렸습니다
어디가 끝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볼 곳 하나 없는 텅 빈 산중입니다
무거운 배낭 속에는
지키지 못한 약속과 갚지 못한 시간들이
돌덩이처럼 담겨 나를 누릅니다
숨을 몰아쉴수록 안개는 더 깊게
허파를 파고들어 나를 가둡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멀리만 보려 했다는 것을
어깨를 누르던 짐들을 길가에 밀어 두고
허리를 숙여 발밑을 봅니다
안개에 젖어 축축한 흙바닥
거기 나를 지탱해 주던
투박하고 정직한 신발 두 짝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상을 꿈꾸기보다
지금 내딛는 이 한 걸음에만
나의 모든 무게를 실어봅니다
한 걸음 내디디면, 딱 그만큼의
새로운 길이 안개 속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가진 것을 잃으니 길이 단순해집니다
복잡한 지도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오직 살아있다는 감각 하나로
한 발, 한 발 벼랑을 지나갑니다
안개는 여전히 짙지만
나는 이제 길을 잃지 않습니다
내 발바닥이 닿는 이곳이 곧 나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