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리에서>

무너진 것은 나를 가두던 담장이었을 뿐, 나는 여전히 이곳에 서 있다.

by 내려놔야 산다

​견고할 줄 알았던 담벼락이

한순간에 허물어졌습니다

정성을 다해 쌓아 올린 시간들이

먼지가 되어 눈앞을 가립니다


​무너진 돌무더기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남겨진 것이라곤 깨진 조각들과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뿐입니다


​하지만 먼지가 가라앉고 나니

비로소 담장에 가려졌던

해 질 녘 그림자가 길게 보입니다

담벼락은 무너졌어도

나라는 존재의 그림자는

여전히 땅 위에 선명하게 그어집니다


​벽이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그 너머에 이토록 넓은 빈터가 있었음을

막혀 있던 시야가 터지고 나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는

가장 정직한 땅임을 알겠습니다


​허물어진 돌들은 다시 주워

성벽을 쌓는 대신 디딤돌로 쓰려 합니다

높이 쌓아 나를 가두기보다

낮게 놓아 내가 딛고 일어설

단단한 지지대를 만들겠습니다


​폐허가 된 이곳은

이제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나만의 고요한 영토입니다


​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