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Crew)는 나의 힘 2

내 안의 잠재력을 끄집어 내주는 고마운 마중물

by 나는

크루(Crew): 공통된 목적, 관심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 원래 배의 선원이나 승무원을 의미했으나, 현대에는 힙합, 댄스, 스포츠, 직장 등 특정 분야에서 함께 활동하는 팀이나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됨 (출처: Google Search)


이제 자동적으로 눈이 떠지는 주말 새벽. 평소보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이불속이 좀 더 아늑하게 느껴졌지만 갈까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 직장처럼 당연스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이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좋은 습관을 만들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매번 갈까말까 할까말까 고민하는 시간 자체를 없애고 그 시간마저 계획된 좋은 습관을 수행하는 데 몰빵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나, 끝까지 달리는 성공한 러너가 될 수도 있겠는데 하며 미소지었다.


약속 장소에는 나를 포함해 8명의 러닝크루들이 모였다.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 팀과의 약속을 지켜낸 멋진 멤버들. 꽃샘추위를 방불케 하는 손이 시린 우리의 이른 주말 아침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러닝크루의 운영진 중 한 명인 C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나보다 훨씬 빨리 오래 뛰시는 그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건강을 위한 가벼운 달리기가 주 목적인 나는 보통 대열의 맨 마지막에서 뒤처지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숨이 차지 않게 끝까지만 달리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전날 있었던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여전히 안개처럼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누군가의 입김으로 그 안개를 흐뜨리고 싶었다. C에게 물었다. "혹시 가장 최근에 빡친 일이 뭐예요?" 달리기라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를 해서인지 달리는 중에는 '척'을 안 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아올린 나만의 이미지나 TPO(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에 맞는 말과 행동과 표정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목적지를 향해 다리를 움직여 한 발을 더 내딛고 호흡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데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적어도 초보 러너인 나는 그렇다.


한 회사의 매니저로 근무하는 C는 최근 회사에서 있었던 빡친 일을 이야기해 준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나의 빡친 어제를 공유한다. 내 입을 떠나 내 귀로 듣게 되는 사연은 그 스토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약간의 객관성을 부여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이어지는 C의 해석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비춰준다. 우리의 빡침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 상황에서 빡침이 올라왔을지 그 근원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렇게 과거의 에피소드가 오가며 미래의 계획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목표했던 달리기 거리는 다 채워졌고, C와의 대화에 빠져들어 무념무상 달린 덕에 킬로미터당 7분 후반대를 기록하곤 했던 나는 6분 1초라는 평균 최고 기록을 달성해 버렸다. C 덕분이었다.


새해 들어 향후 두 달 동안 일주일에 두 편의 글을 발행하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라라크루 14기. 어느덧 2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고 나의 글은 4-2에서 멈춰져 있다. 하루에 한 편씩 쓴다 해도 고작 5편인데 8-2에 이르려면 8편을 더 발행해야 한다. 그래도 라라크루에 조인하지 않았으면 한 편의 글도 남기지 못했을 수 있는데 덕분에 올해 8편의 글은 남겼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완주를 위해 하고 싶은 말도 없는데 억지로 숫자를 채워 나가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평소처럼 새벽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습관처럼 옆에 놓인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카톡방에 올라온 새 메시지를 확인했다. 라라크루 운영진 중 한 명인 S의 글이 남겨져 있었다. 글쓰기 마지막 주의 시작을 맞아 막판 힘내기를 독려하는 한 편의 수필이었다. 평소라면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네 하며 이불속 온기를 만끽하다가 알람이 울릴 때가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났을 텐데, S의 메시지는 나를 일으켜 책상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내 글의 한계에 대해 라라크루 카톡방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도덕 교과서 같은 결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진부함에 대해. 크루 중 한 명인 Y는 답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자세, 태도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 고마운 제안에 기대어 나의 빡친 하루를 매우 부끄럽지만 공유해 본다. 함께 식사하는 동료들과 나눠 먹을 요량으로 꿀떡 한 봉지를 들고 출근했던 날, 이들은 나를 빼놓고 회사 밖에서 법인카드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추가하자면, 밖으로 우르르 이동하는 이들이 카페테리아로 간다고 착각한 나는 서둘러 따라나셨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 간다며 주차장으로 향했고 미처 뱃지를 들고 나오지 않은 나를 위해 친절히 카페테리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같이 가자는 빈 말조차 하지 않은 채.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빡침이 올라왔다. 내가 먼저 다가가고 말 걸고 웃으며 이야기 나누고 후식으로 먹을 간식도 싸와 나눠 먹고 내 아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장난감을 물려주고 했던 그 많은 노력들이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느지막히 돌아온 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나눠 먹고 남은 꿀떡 한 개씩을 전하며 농담반 진담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했다. "앞으로 그러지 마세요. 기분 좋지 않습니다~." 어색한 웃음만 흘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 빡침이 올라왔다. 사무실을 나와 근처 산책로를 30분 정도 걷다가 돌아왔다. 햇살은 눈부셨고 하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내 마음만 그렇지 못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러닝 크루의 C는 말했다. 아마 다들 남자분인데 여자 한 분이 끼는 게 불편했을 수 있어요. 이미 오래 같이 일한 사람들이라 자기들끼리 있는 단톡방에서 외식하자고 갑자기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고 그걸 미처 전달하지 못했을 수 있어요. 카페테리아로 가는 문을 열어 준 분은 본인이 의사결정할 위치가 아니라서 엉겁결에 도와준 것일지도 몰라요. 그들이 나를 은따시키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건 너무 성급한 결정일 수 있어요. 일단 직장은 일하는 곳이니까 일에만 집중하세요. 신뢰든 정이든 쌓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


맞는 말이다. 일단 고작 먹는 것 때문에 빡침이 올라왔다는 점이 살짝 부끄럽긴 하다. 그 근원을 더듬어 본다. 먹성 좋은 딸 다섯 중 넷째로 태어나서일까.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도 나에게는 두 개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었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끝에 어떤 과자를 사도 5등분해서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과자를 크리넥스에 곱게 싸서 빈 박스에 차곡차곡 모으기도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 습기를 먹어 눅눅해진 과자뭉치를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지만.


한국에 살 때 벤처기업에서 일하다가 대기업으로 이직한 지 두 달여 뒤에 내가 팀에서 은따를 당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특정 대학 특정 학과 출신을 경력직으로 연달아 뽑는 것에 불만을 품은 기존 직원들이 새로 들어올 나를 일단 배제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었단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나는 원래 이 회사 분위기가 그런가 보다 하고 성실히 내 일에만 집중했었고, 그 모습을 좋게 본 앞자리 대리님은 나에게 살짝 귀띔해 주시며 잘해 주시기 시작했다. 결국은 해피엔딩.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의 이민이 결정되면서 그 팀과는 아쉬운 작별을 했고, 그중 일부는 지금도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만나고 있다.


한 사람의 오늘에는 그 사람의 과거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알면 오늘의 그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의 과거를 모르는 나의 무지를 인정하며 오늘의 그를 멋대로 평가하지 말자. 잠시 후 출근해서 마주하게 될 그들에게 나의 무지에 대한 겸허한 마음으로 따뜻한 미소를 보내 볼 요량이다. 그리고 예전에 했던 것처럼 내 일에 오롯이 집중하며 열심히 일해 볼 생각이다. 그렇게 밝고 진솔한 하루가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다가올 이별이 더욱 아쉬워지겠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좋은 인연으로 기억되겠지. 그것만으로 족하다.


더불어, 다시 한 번 크루의 힘을 절감한다. 나만의 생각에 갇혀 있던 나를 해방시켜 주고 나를 표현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일상의 (빡침으로) 빛나는 순간을 글로 포착하게끔 마중물이 되어 준 고마운 크루 멤버들. 오래도록 같이 가보고자 한다.


#라라크루 14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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