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앤 애프터 (Before & After)

그 경계를 지나며

by 나는

2025년 7월, 문득 11년을 다닌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퇴사 후 갈 곳을 정해 놓지 않은 채 적지 않은 나이에 정처 없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나이 들어 가며 확신할 수 없어지는 건강처럼 옅어졌지만, 늘 부러워하기만 했던 학교 선생님의 방학 또는 대학교수의 연구년 같은 쉼표를 나에게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나를 토닥여 주고 앞으로 남은 인생 후반전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사실 이러하다. 새로운 일을 맡았고 그 일을 배우고 적응하려 고군분투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이에 대한 실망감을 전혀 감추지 않는 상사의 모습에 점점 자신감과 의욕이 사그러 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고 나의 조바심과 불안함은 더욱 증폭되었다. 상사와의 편치 않은 관계는 나의 급격한 체중 감소와 어두워진 표정으로 이어졌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 주어진 일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기회였고 분명 잘하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내기 위해 내가 의지할 자원은 빈약했다. 벤치마킹할 수 있는 기존 프로세스나 자료가 희박했고 자문을 구할 상사나 동료들은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급한 업무에 매여 있어 도움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로펌 대리인도 비싼 수임료 때문에 쉽게 활용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에 나는 저녁 시간과 주말에도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의 불안함을 몸의 고단함으로 상쇄하려는 듯이.


그리고 결국 제출된 사표. 나를 지키고 싶었다.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하는 내가 안쓰러웠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드는 내 마음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사표가 수리되고 하나씩 퇴사 절차가 진행되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 눈물이 내가 잃게 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인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인지, 이제는 남이 아닌 나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안정된 직장과 좋은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데 대한 아쉬움이 밀려들어 우울해 지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회사에 매여 있느라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기회를 통해 나를 좀 더 잘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 처리 방식은 어쩌면 시간을 들여 깊이있게 일의 모든 측면을 검토하지 않은 채 마무리 지으려는 성급한 성향이었을 수도 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신경을 쓰기보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에만 집중해 왔던 나의 행동은 어쩌면 남의 눈에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회사에서 일과 인간관계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주저없이 전자를 고르던 나는 회사와 일을 잃고 나니 철저히 고립되어 버렸다.


외로웠다. 스스로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가족 외의 타인과의 교류가 절실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적어도 나는 사람과 어울리며 에너지를 얻는 부류라는 것을. 지금까지 늘 부족했었던 시간이라는 자원이 비로소 많아진 나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동참하고, 주말 러닝 클럽에 가입했다. 아이가 한때 다녔던 한글학교 이사회에서 봉사를 시작했고, 미국 내의 모교 동창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커리어를 계획할 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분야로 운 좋게 다음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같은 팀 외에도 회사 건물 내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동종업계 외부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킹도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아다녔다.


퇴사 후 3개월 동안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한없이 안으로만 움츠러들었던 나의 Before는 그렇게 새로움과 설레임의 옷을 입고 한없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After로 변해 갔다. 만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고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서서히 많아질 수록 내가 벌인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낼 에너지가 나에게 충분히 있는지를 가끔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되찾은 일상의 생기와 의욕을 나에 대한 믿음으로 치환하고 있다. 생각보다 내가 더 현명하게 잘 대처할 것이라고, 시간의 효율과 집중력을 충분히 이용하면 될 것이라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져본다. 근거가 없다는 게 어찌보면 불안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반박하거나 공격할 근거가 없으므로 무적일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새로운 분야의 일에 뛰어든 지 얼추 세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관련 업무를 많이 배우고 성장했는지 돌이켜 보면 사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전 직장에서와 유사한 상황이지만 이에 대처하는 내 자세가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불안함이나 조바심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어디 이번엔 제대로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 만족스럽지 못한 지난 3개월 동안 안 되는 방법 중 하나를 알았으니, 이번엔 되는 방법 하나를 알아가 보자 하는 유쾌한 오기가 생긴다.


오늘 아침 근무를 시작하기 전 Gemini와 마주 앉아 내 학력과 경력과 직무에 적합한 단기/중기/장기 커리어 개발 플랜을 작성했다. 상사가 딱히 시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구축해 온 내 네트워크를 동원해 업무와 관련된 영역을 배우고 확장할 수 있는 트레이닝 및 네트워킹 기회를 찾아냈다. 이제 남은 일은 재거나 따지지 말고 일단 하고 보는 실천의 단계. 내 계산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변수가 있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몇 년 후의 After 버전이 된 내가 미소지으며 돌아 볼 아련한 Before가 될 것이다. 그 경계를 명랑하게 웃으며 건너가 보고자 한다.


#라라크루 14기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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