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의미

죽기 전에 해야 한다는 그 많은 일들 중 으뜸은 수시로 감동하기

by 나는

부쩍 나이 들어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 중 하나는 초저녁잠이 많아지고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주말 러닝클럽에서 하프 마라톤을 살짝 넘는 거리를 달린 일요일 오후, 남편의 대학 은사님 부부와 연구실 선후배를 초대해 놓은 터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고, 그 덕에 꿀잠을 푹 자겠거니 기대했는데 잠든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터라 늘 하던 대로 구독중인 브런치 작가분들의 글들을 읽다가 조하나 작가님의 최신 글 [슈퍼볼 하프타임쇼, 배드 버니의 거대한 문화적 시위- 리듬으로 권력을 조롱하다]를 접했다. 그리고 십여 분 뒤 볼을 타고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배드 버니(Bad Bunny)에 대해 알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한국에 살 땐 사회생활의 필수 코스인 노래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치 공부하듯 최신가요 top 10을 듣곤 했지만, 미국으로 와 노래방 문화와 멀어지면서 대중가요나 가수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 들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 사무실이 올해 슈퍼볼이 열린 리바이스 경기장 건너편에 위치한 터라 지난 한 주 동안 행사 준비가 하나씩 진행되는 것을 매일 목격했었고, 함께 점심을 먹던 동료 중 한 명이 배드 버니가 이번 행사에 온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서야 비로소 배드 버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구글 검색을 해 보니 배드 버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가수로 현재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미식축구의 경기 규정도 모르고 운동 방식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슈퍼볼 하프타임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직장 동료가 배드 버니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준 데 이어, 조하나 작가님이 하프타임에서의 배드 버니의 활약을 글로 전해 주었다. 궁금했다. 과연 천문학적 금액의 광고가 붙는 그 대단한 하프타임에 배드 버니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 호기심에 유튜브에 올라온 2026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 영상 13분짜리를 시청했다.


노래 가사는 전부 스페인어였다. 춤은 현란했다. 무대 장치는 기발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에는 호소력이 있었다. 노랫가사가 무슨 뜻인지 어떤 맥락인지 알 수 없어 추측과 상상에 의존해야 했지만, 배드 버니의 진솔한 눈빛과 등장인물들의 흥겨움,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등장한 유일한 영어가 마음을 흔들었다. "God bless America!" 그리고 남미 나라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열거되고 마지막에 미국과 캐나다의 이름이 불렸다. 현 정권 하에서 미국만을 아메리카의 전부인 양, 백인 남성을 주류의 전부인 양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유쾌한 반기. 조하나 작가님의 글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지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고, 내 마음도 움직였다. 그 동요가 눈물이 되었다.


내 눈물의 의미를 나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민자로 세워진 나라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핍박이 강해지고 있는 현 정권에 대한 분노인지, 그 안에서 한숨쉬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를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의 무력감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그러면서도 나와 내 가족의 안위에만 초점을 맞추며 하루치의 행복을 챙기기에 급급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배드 버니는 자신이 가진 영향력으로 자신이 설 수 있는 플랫폼 위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용기 있게 내보였다는 점. 그 행위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내 마음에까지 와 닿아 '우리'라는 범주가 얼마나 광할한지를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나 무시해도 좋을 대상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느낌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국경으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 위의 아메리카라는 같은 대륙에 사는 동일한 인간이라는 점,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고 쓰는 언어가 달라도 사랑과 기쁨과 슬픔과 분노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같은 인간이라는 점, 그 연대감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나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한국이 지금처럼 경제적이나 문화적으로 유명해지기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선배 이민자들은 종종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같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지만 나는 배드 버니가 열거한 여러 남미 국가들이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인지를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고 싶어졌다.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배드 버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와, 배드 버니가 목청껏 외쳤던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멕시코,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아이티, 엔틸리스가 얼마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와 사람을 가진 곳인지를.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한 나라 한 나라를 알아갈수록 나의 세상이 한 뼘씩 넓어지는 것은 물론 예상치 못한 감동의 순간을 수시로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전쟁의 폐허로만 기억되던 과거의 한국이 오늘날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역동적인 씨앗을 품고 있었던 놀라운 민족이었던 것처럼, 갱단의 위협과 가성비 좋은 관광지로만 인식되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무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를 토대로 한 감동적인 서사를 보여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하니, 제대로 보기 위해 하나씩 알아가 보련다.


#라라크루 14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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