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책임 윤리'
서러운 여린 발이 누군가의 구둣발로 모질게 밟혔을 때, 나는 나의 발이 아픈 줄 압니다. 작은 맨발로 다니면서 이미 여러 곳에서 짓밟혔던 발입니다. 그 발에 난 생채기와 상처가 여전히 아픕니다. 여전히 뜨겁게 고통스럽습니다. 여린 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세상에 발을 내딛습니다. 사뿐사뿐 조심스럽게 거칠고 험한 길을 디디며 말입니다. 세상에는 크고 거친 군화를 신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그들에게 저의 발을 또다시 밟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군화로 상징되는 거친 발들의 세계에서는 맨발인 자의 자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거칠고 딱딱하고 무거운 구두에 광을 낸 신발들이 즐비할 뿐입니다. 그 신발을 신을 자리가 있는 자들은 군화에 발을 욱여넣고 뚜벅뚜벅 안전한 걸음을 디딥니다. 그러나 군화를 신은 자의 발도 때로는 더 큰 군화의 발에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군화를 신은 그의 발에도 아픔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짓밟힌 자'라는 낙인과 수치심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는 상처를 회복할 시간도 없이 다시 더 크고 강하고 거친 군화를 신으며, 구두끈을 꽉 조입니다. 신발에는 상처 입은 발을 감추기 위해 더 번쩍이는 광을 냅니다. 맨발과 군화를 신은 발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같습니다. 같은 곳을 거닐고 얽혀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모두가 함께 걷습니다. 누구나 서로의 발을 밟을 수 있는 세계입니다.
저는 복직 이후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날카로운 태도였습니다. 아주 단순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도, 그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을 했고, 자신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성의 목소리로 날카롭게 잘라내는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저는 위축되고 작아졌습니다. 그는 저로부터 자신을 방위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이는 싫은 기색을 역력히 내며, 시선조차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함께 근무를 하던 동료라고 생각했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들의 태도가 무척이나 서늘해졌습니다. 그들과 저는 전혀 문제가 있었던 사이가 아니었는데, 왜 제게 그런 방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책임 윤리를 가진다는 것.
저는 그러한 일이 있을 때 평소 저를 지지해 준다고 느꼈던 이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 속상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겠죠. 신경 쓰지 마요.'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저의 든든한 지원군인 제 여자친구에게 했을 때, 여자친구도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힘들까 봐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제가 신뢰하는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마치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위로로 잘 와닿지 않았었지만, 나중에는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감각과 기분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오늘 책임윤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구둣발로 얽혀있는 곳에서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부여받은 '생명'이란, 생을 살아내는 명령을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인 이 세계에서 타인에 대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명령인, '책임윤리' 또한 가지게 됩니다.
책임윤리란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의도적 폭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큰 발이 작은 발을 밟는 것에 대해 참지 않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내가 발이 밟힐 때가 있을지언정,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서 바꾸어 가는 것이지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폭력이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아픔을 사랑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정치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큰 곳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합니다.
더 나은 노동권을 위해 투쟁했었던 전태일 열사나 여공들도 작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둣발로 얽힌 세상에서 맨발로 살아갔던 존재들입니다. 구두를 신은 자들이 자신의 구두의 광택을 내는 동안에, 생채기가 가득한 맨발로 뜨거운 불길을 걸어내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큰 게 작은 것을 지배하는 세상의 거대한 장벽을 일부 허물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가 아니라, 바로 목숨을 불사해도 아깝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책임윤리'로부터 만들어 낸 커다란 변화입니다.
그 변화 속 수혜자는 단순히 맨발로 살아가는 자들 뿐만이 아닙니다. 허물어진 폭력의 위계에서는 구두를 신고 살아가는 이들의 두려움 까지도 같이 허물어집니다. 더 큰 구두에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그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까지 말입니다.
얽혀 있는 구둣발의 세계에 맨발인 자로 살아가는 자로서 경계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공감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내가 발이 밟힌 아픔이 너무 커서, 그 안에서 다른 구둣발로 발이 밟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나와는 달리 ‘구두를 신어 안전한 자’로 판단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두를 신었어도, 구두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자입니다. 그는 아픈 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소화시키지 못해 타인에게 그 감정을 투사하는 미숙하고 연한면이 가득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을, 그의 몸부림을 안타깝게도 저는 듣지 못합니다. 발을 밟힌 순간에는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볼 여유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책임윤리를 가지는 일에 영향을 미치게 만듭니다. 제 발에 느껴지는 고통의 강도가 너무 강해서 '고통을 준 자'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는 왜 나의 발을 밟으려는 것일까?' '그는 내가 작은 존재라 여기기 때문인 것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큰 존재가 되어서 다시는 발을 밟히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책임윤리를 잃게 만드는 '사탄의 사고방식'이 시작되는 길입니다. 사탄은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게 하고, 타인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마음 안에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세상에 대한 신뢰'라는 믿음을 잃게 만들어 한 인간을 점점 고립되게 합니다.
다행히도 저의 주변인들은, 아름다운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 입니다. 또 다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생각의 회전목마를 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내면의 고통을 잘 들여다보고 돌보아 주는 것 말입니다.
그에게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어떻게 느끼는지' 이니까요. 타인에게 선하거나 친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는 상처 입은 자들입니다. 그 또한 구둣발의 세계에서 상한 발을 감추며 엉기어 살아가는 가엾은 존재입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지원군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이들로부터 힘과 위로와 지지를 얻으면, 다시 세상을 향해 책임윤리를 잊지 않고 걸어갈 희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한 목사님이 "예수님이 세상에 온다는 것은, 인간이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것과도 같은 일"이라 말해 주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사랑은 구원자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원자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시작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지금 여기. 당신이 살아있는 이곳 이 땅을, 새 하늘 새 땅과도 같은 곳으로 바꾸어 나갈 때, 세계는 사랑으로 가득 차오르며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세상에 책임의식을 갖고 그 윤리성을 지켜내며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윤리적 책임만큼이나, 세상을 돌볼 책임윤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객체가 아닌 유기체적 관계를 맺고 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생명들의 목숨을 받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단순히 자신이 잘 먹고 잘 살며, 스스로의 목숨만을 귀히 여길 뿐이라면, 나를 있게 하는 세상의 존재들을 보살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 못한 일입니다. 세계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반면 우리의 주변에 책임윤리를 가진 존재들이 느껴진다면, 우리의 세계는 따뜻한 것입니다.
세계는 차갑습니다. 무겁습니다. 외롭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따뜻합니다.
저는 책임윤리를 가진 따뜻한 존재들 덕분에, 그 따뜻함 안에서, 저의 책임윤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눈 맞춤 안에서, '영원한 하나'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