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선물. 현상

현상 - 경멸의 시선 속에서도 '말하는 자'로 살아가는 이유

by 백안


이번 선물은, '폭력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에 존재하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써 보았습니다.



첫 신고를 마친 후 약 8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성폭력 사건의 심의결과가 나온 지는 신고를 하고 난 후 8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입니다. 혼자서는 못 견디어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제 곁에는 너무나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저의 작은 몸부림을 알아차려 주는 고맙고 뜨거운 시선들의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직하기 전 1주일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폭력이라는 커다란 폭력과, 그것에 대해 조직적으로 보호조치조차도 개입하지 않으려는 행위를 경험했기에, 마음 안을 슬픔과 고통으로 크게 얼룩져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잘못을 한 자가 아닌, 잘못을 당한 이에 대한 태도가, 여전히 견디기 어려울 만큼 차가워서 흉터로 남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세상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과녁의 세상에서, 역과녁의 세상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서는 '폭력과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려는 무수한 존재들의 얼굴'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게 만듦으로써, 세상이 만들어내고 있는 폭력 속에 신음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고민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폭력을 당한 자로서 더욱이 안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안과 밖으로 나뉜 세상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 선택이야 말로, 강자의 논리와, '폭력-지배의 길들이기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원하는 선택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과녁의 밖'에 존재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눈 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저의 양손으로는 세상이라는 무거운 천장을 제 두 손으로 버티고 서서, 두 발로는 땅을 굳건히 딛고 버티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옆에는 보이지 않아도 저를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꺼이 저의 천장을 함께 들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화살이 맞은 그 자리의 피가 미처 아물지 않았습니다. 피 흘리는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나아갔을 때 세상이 저라는 한 인간을 보고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간절히 바라는 역과녁의 세상(사랑이 확장되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은, 그러한 세상의 개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세상에 계속해서 보이고 들려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꺼이 제 모든 상처들과 피 흘리는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피 흘리는 자를 혼자 두지만은 않았습니다. 세 번의 신고에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성인지 감수성과 성폭력 예방 교육'을 관리자를 비롯해 일반 직원까지 전체로 5번에 걸쳐서 시행할 예정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 대상자는 어림잡아 5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의 직원들까지, 그 대상이 폭넓게 확대되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은 약자와 소수자가 당하는 폭력과 비명에 응답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이상하고 무서운 여성인 저에게도, 변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자' 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덜 아플 수 있게, 그 아픔을 두 손과 두 발로 지탱하더라도 '강하게 버텨내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한 집단에서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들도 그곳에서는 개들에 불과할지언정, 국민이기 때문에 포용받는 지점 또한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3개월간의 휴직을 거치고 다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존재함으로써 그 무게를 감당하기를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저의 버티기는, 그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또 다른 폭력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에 울타리가 되어주는 화살비를 조금은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울타리가 되어 필요한 사랑과 평화의 언어를 전해 주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과, 그런 여성들을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서 저의 영원한 하나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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