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선물. 현상

현상. '정복'을 넘어선 '공존'

by 백안
권력이 응집된 것처럼 보이는 허상과도 같은 과녁의 정중앙을 좇는 일은, 세계에 대한 폭력구조를 정당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파멸하게 만든다.
-백안




2025년 6월 20일,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해준 한 연대자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1996년부터 성폭력 예방 강사로 활동하며, 30여 년간 언어가 가진 힘을 믿고, 사랑과 연대를 통해 폭력의 세계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저항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행정소송과 2차 가해에 대한 법적 조언을 들었으며, 그날 그녀와의 만남은 단순한 교육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정복'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마음이 묘하게 쓸쓸해집니다.
그 단어에는 전쟁과 영토만이 아니라, 삶을 향한 욕망과 불안, 그리고 서로를 정복해 지배하려는 오랜 역사가 함께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정복은 때로 낭만처럼 말해지기도 합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매우 가기 힘든 곳을 이겨내고 간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에베레스트 정복’ 같은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산이 아닌, 인간에게 사용될 경우 상대를 하나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분명한 시선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더 많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에베레스트처럼, ‘정복할 가치가 높은 존재’라는 대상화된 인식 때문입니다.



국가라는 통치기구가 생겨남으로 인해 오랫동안 전쟁으로 인해 소모된 인간성의 역사란, 말할 수 없이 두렵고 허망하며 공포스러웠을 것입니다. 인간이 전쟁과 폭력상황에서 짊어진 사회의 책임과 무게 속에서, 전쟁상태에 처해진 인간은 내일을 알 수 없었고, 어떠한 희망과 기대를 갖는 것조차도 사치였을 것입니다.



두려움 앞에서도 울지 말아야 했던 시간들. 군대에서의 훈련, 위계, 통제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밀어 넣어야 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은 종종 세상을 향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 불신은 ‘억울함’이라는 감정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로 억울한 감정을 대신 토로하면서,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를.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비애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세상에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왜 어떤 인간들은, 사회적 책임에서 비켜서는가?”


“왜 나는 사회에게 이용당해져 나의 존재를 소모해야 하는가? “


그 질문 안에는 사실, 깊은 두려움과 외로움. 공감받지 못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상의 ‘폭력적인 과녁’을 저항해 내지 못한 채 상처받은 마음입니다.

두터운 상처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진정한 자신'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자신과의 눈 맞춤에서 비켜난 시선은, 자신과 타인을 폭력적인 관점으로 응시하는 데에 쓰입니다.


분노, 두려움, 외로움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비난하는 데에 쓰인다면, 그것은 한 인간을 엄청난 폭력으로 또다시 몰아넣는 일입니다.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한다면, 권력을 가지지 못한 나를 탓하게 됩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치심을 내면화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더 큰 폭력을 불러냅니다. 자신보다 비교적 약자라 인식하는 존재들에 대한 폭력과 그들을 정복할 수 있다고 인식함을 통해, 수치심과 두려움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의 분노와 두려움들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또다시 일조하는 과녁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그 구조 자체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입니다.




전쟁은 두 가지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두려움'과 '지배욕'이 그것입니다.

전쟁은, 흔히 우리를 폭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엄청난 국가적 권력이 되고, 사회적 정의가 되며, '전체주의'라는 무서운 파시즘이 국가와 국민 전체의 정서가 되기도 합니다.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 또다시 상대를 짓밟으려는 전쟁으로 변화합니다. 그것은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을 끝없이 생산하는 일입니다. 그 허상과도 같은 과녁을 열심히 쫓아가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고 침범하는 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타자화가 일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것은 적국에 해당되는 인간뿐 아니라 '나와 다르다고 구분지은 나 아닌 존재'가 되었을때 무한하게 어떠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폭력을 저지르게 됩니다.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대하는 방식.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보는 시선. 애완동물과 식량을 제공하는 동물로 구분지었을때, 그 동물의 자유를 전부 구속함은 물론, 피한방울, 뼈한조각까지도 모두 탈탈털어서 인간을 위해 생명을 제공하고 바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하나' 가 되기 위해서 나아가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현재는 내가 남보다 더 특별한. 즉, '하나'의 존재가 아닐때 진열장에 놓을 트로피들을 더 수여해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정복은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을 지키려는 것을 포장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 안에는 스스로의 텅 빈 자아를 감추기 위한 허상적 권력을 좇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마음. 즉, '타자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트로피의 진열장처럼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가 시작되어 정복논리가 발동하기 시작하고, 거기서부터 폭력과 전쟁은 시작됩니다. 과녁의 정중앙은 사실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허상일 뿐이니까요.


나는 ‘세상의 개들’을 떠올립니다. 이름 없이 살아가며, 지배와 경쟁의 구조 속에서 언제나 뒤로 밀려나는 존재들. 그 안에는 언제나 상처 입은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폭력은 한쪽의 전유물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가 만들어낸 공동의 고통입니다.


지배 구조 속에 소외되고, 이름조차 잃은 존재들. 그들은 냉소와 분노를 입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권력은없지만,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가득한 기억들이 남게 됩니다.

폭력에 저항해야 하는 존재는 단순히 약소국, 전쟁난민,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권력의 위계 안에서 발생되는 폭력으로 희생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이름 없는 전쟁 속에 소모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싸움은 더 이상 ‘누가 약자인가’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갈 방향 또한 타자화도, 정복도 아닙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존재들과 함께하는 '공존'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연대'이며, 침묵과 외면이 아니라 '목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정복을 멈추고, 공존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으로서의 '책임윤리'입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생명들을 빼앗아가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존재들이 댓가없이 바치고 있는 희생속에서 우리가 목숨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구가 주는 무한한 사랑을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믿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대한 힘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개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이 만들어갈 또 하나의 연대가, 세상에 안전한 그물망을 엮어내며 꿰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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