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아라는 탑을 버리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세상에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와 타자와의 연결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앞서 말씀드린 역과녁의 세상과 자아를 연결 지어 조금 더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자아의 형상 그 자체에는, 나를 어떤 대상화하는 이미지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이미지는 나라는 실체의 방향성을 갖게 만듭니다. 탑은 돌 본래의 속성에 설계의 방향을 갖게 합니다. 다듬어지고 조각되어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고, 또 더 높이 아름답게, 견고하고 튼튼하도록 말이지요. 그렇게 많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기준들이 존재할수록, 탑은 그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의 본디 속성은 씨앗입니다. 씨앗을 자라나게 하는 세계의 오행이 함께 작용해야 하며, 나무가 줄기일 경우 그것이 타고 올라갈 든든한 그물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조형물에 얽힐 경우 그 대상과의 어울림과 조화 또한 고려되어야 하며, 필요 없는 부분이라 여겨질 경우 잘라내어 지게 됩니다.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은 많은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 되기 위에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평화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전쟁을 반복하여 의견의 수렴을 끝없이 해 가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성은 본래 인간을 집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상실하게 합니다.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기도 하며 폭력과 전쟁이라는 불씨를 자아내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자아의 공통점을 찾으셨나요? 바로 ’ 인위적‘ 이란 뜻입니다. 자연 자체의 속성인 돌, 씨앗, 집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상실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는 거대한 과녁의 굴레를 자아내게 합니다. 존재 자체가 목적이 아닌,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쓰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내면의 자아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와 그 바위틈에 피어나는 잡초를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큰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치는 파도를 상상해 봅니다. 그 바위 뒤에는 조그마한 텃밭을 함께 가꾸는 공동체 마을 몇 가구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한 마을이 연상됩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의 돌과 그 사이에 핀 생명력 있는 존재들을 말이에요.
그것들에 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현무암에 부딪치는 바닷물이 키우는 사이사이에 핀 잡초들은 이름이 없기에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이 만든 신비로움이 일어난 현상입니다. 수많은 자연물들이 얽혀서 빚어내는 자연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깎고 조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자연물 그 자체와 연결되어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임이 분명하다는 인식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인위적임이 아닌 자연과 연결감을 가까이 느낄수록 존재가치라는 허상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자아의 가치라는 허상을 만들어두고, 그 안에 사로잡힌다면, 결국 평생을 불필요한 불안을 껴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힘겹게 바위를 조각하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연결’ 일뿐임에도 말입니다.
힘겹게 애써온 당신의 그 두 손을 꼭 쥐어주며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미 크고 무거운 아름다운 바위“라고요.. 파도에 부딪치는 바위의 소리를 상상해 봅니다. ‘찰싹.. 찰싹..’ 바위는 느낍니다. 단지 파도가 찾아왔구나.. 하고요. 파도를 통해 바위는 양분을 얻기도 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행동에는 어떠한 노력도, 인위성을 가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단지 나와 네가 만나는 행위. 그 자체가 존재할 뿐이지요. 존재에 대한 방식을 생각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