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 ‘고통체의 전도사, 인간’
“나는 생각한다”는, “나는 소화한다”. 나, “나는 혈액을 순환시킨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틀린 문장이다. 소화가 일어나고, 혈액 순환이 일어나며, 생각이 일어날 뿐이다.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 에그하르트 톨레
독일의 유명한 영적 지도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작가이기도 한 ‘톨레’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에는 ’ 고통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톨레는 인간이 무의식을 이해해 자아를 내려놓고, 진정한 ‘참 나’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고통과 업의 소멸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톨레의 말처럼, 자아의 내면에는 고통을 끝없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체’라는 부분이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얽혀서 상호 작용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세계에는 평화와 고통이 동시에 전염된다고 여깁니다.
저는 인간이 고통을 인지하는 것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는 것과, 외부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전자의 경우,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마음 안에서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일어납니다. 그를 돕고 싶어 하는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고 그에게 무언가 도움을 전하고 싶어 집니다.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두 번째입니다. 외부에서 온 현상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는 내부의 ‘고통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부자극의 상황에서부터 너무나 쉽게 자신의 자아를 변형시켜 (고통체)로 만듭니다. 매우 예민하며, 그것이 실제로 폭력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그 공기를 읽음으로써 폭력으로 인지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반응은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쏟아내었을 때 바로 그 먹이를 내가 받아먹어 또 다른 고통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 이타심이 일어나지만, (내가 마음씨앗에 동정을 넣어 그것을 자비로 생산해 낸 결과) 두 번째는 타인이 고통을 배출해 낸 행위에, 내가 나의 고통체에 반응을 일으켜 버린 것입니다. 현존(지금-여기에 존재)하는데 인간은 바로 이러한 점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습니다. 특히 내가 공간의 공기를 읽고 그것을 생각과 연결시킬 때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내면의 지옥이 시작되곤 합니다.
공간에서의 소수자는 공기를 읽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 공간의 절대다수가 그 공간의 공기의 흐름과 분위기를 만들고, 그 공간의 권력자로부터 정해둔 정답과 오답까지도 결정지어 두기 때문입니다. 소수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러한 공기를 익숙하게 읽고 현명하게 잘 숨거나 나에게 위협적인 공기를 내뿜는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자신을 그림자 속에 가두어 두어야 안전감을 느끼니까요.
“있다 being” 이란 상태에서 ”되다 become. 의 차이.”
인간이 실존하는 상태. 즉, 무언가 자아의 형상화가 되지 않은 상태. 탑도, 돌멩이도, 그냥 그 무엇의 이미지대로 살아야 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 그것이 무아의 상태이자 고통의 소멸이며 현존하는 감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계속해서 불어넣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훈련하기 의해서는, 탑도 돌멩이도 아닌. 내가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감각을 계속해서 떠올려봅니다. 그 단어의 느낌. 상상되는 모습. 내가 얽매여 있는 자아의 실체입니다. 그 자아의 실체를 열어보면, 내가 고통체에 반응한 또 다른 고통의 형상을 한 모습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된다 ‘라고 인식하는 그 실체 자체가, 사실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게 된다면, 내가 무엇인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믿음]을 통해, 어떻게 이 고통을 ‘바라볼 것인지’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