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있다'
행복의 본질을 내면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이들의 불행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의 고통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한 인간의 불행을 알아보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던 분노도 함께 잠잠해진다.
- 백안
후보자
성소수자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타자화된 시선이 존재하고,
오염된 언어들 사이에서,
존재 그 자체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맸습니다.
성별 표현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존재로 끊임없이 규정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국이라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서, 나답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저의 20대는 그 질문들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이 사회에서 제가 설 자리를 찾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4점대의 학점을 받을 만큼 성실한 대학생활을 보내왔지만,
취업을 위한 인턴십에서는 짧은 머리가 문제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차례
"또 남자인 줄 알았다". "왜 그러고 다니냐" 라며 매일아침마다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습니다.
수업 중 교수님들의 발언 속에서 조차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매일같이 견뎌야 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길 바랐지만,
딸로 태어난 저는 가족에게 조차도 존재에 대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삶은, 안타깝게도 출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정답'의 기준에 맞지 않는 외모나 가치관을 가진 이에게 '후보자'로서의 자격조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성별 표현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존재하기
경찰이 되어 무력을 쓰는 일을 한다면, '여성스럽다'라는 성별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외모일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여 오랜 시간 준비했습니다.
비록 경찰은 떨어졌지만, 우연한 기회로 방어와 보호를 담당하는 '방호직 공무원'에 2020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같은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는, 말 그대로 '원 오브 뎀'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성별 표현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습니다.
화장실을 가기만 해도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했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은 빈번하게 반복됩니다.
'지정 성별로 보이지 않는 존재', '다수자의 삶을 따르지 않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버티기
첫 직장인 노원구청에서는, 초과근무와 출장 수당의 부정 수령에 동참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에 따르지 않자, 직장 내 괴롭힘과 인사권을 앞세운 겁박까지 이어졌습니다.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은 신입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구요.
'나는 스스로를 땅에 묻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삶은 빛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저 있는 상태 자체로 빛나는 여러 존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빚진 존재들. 존재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외치는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과, 박해를 받는 그 당사자들이 이미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과녁의 세상에서 피흘리는 존재들인 세상의 개들이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또한 제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나눠주려고 노력합니다.
있다
그래서 어떠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피해”라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그 어떤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선을 긋고 스스로를 지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에 익숙했습니다.
어떤 날은 조용히, 들키지 않게, 폭력을 피해 숨죽이며 하루를 견디기도 하고,
어떤 날은 조용히 언론기관에 인터뷰를 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후보자가 될 자격'을 스스로에게 주며 살아왔습니다.
존재 자체로도 견디기 어려운 삶이지만, '하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믿음이 삶을 이끌어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고, 하나님은 박해받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팔복(八福)'의 말씀을 매일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팔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그 믿음 안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개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고, 연대하고 위로하는 이들과의 선한 만남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 작은 삶에도 눈을 맞출수 있는 눈동자가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합니다.
만약 박해받는 자로서의 삶이 바뀔 수 없다면, 나는 그 안에서 박해받는 자들을 위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역과녁'을 지향하는 저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몸, 나는 있다.
매일 아침,
나를 위한 합장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몸이라는 도구를 통해 내 안의 신을 경험하고,
나의 몸에게 소중한 감각을 경험시켜 주기 위해 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몸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춤을 배웁니다.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허용된 제 몸에게 감사를 느끼며,
결국 모든 것은 몸으로부터 커져있던 생각들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며 가라앉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나만의 몸을 통한 움직임을 통해서, 내면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냅니다.
몸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훈련들은,
내가 느끼는 고통과 현존하는 나를 분리하는 연습을 도와줍니다.
그것은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현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줍니다.
신이 주신 선물은
조건적인 인생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하며,
'지금 여기'에 있는 힘입니다.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