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굿바이 노원구청

과녁 — 세상의 구분선을 인식하다

by 백안

우리는 흔히, 열심히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경계 없는 평등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권력과 구조적 차이에 의해 나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존재한다. 마치 과녁처럼, 사회적 권력은 중심에 위치하고 그 권력적 핵심 사상은 주위를 지배하며 영향력을 전파한다. 중심이 10이라면, 가장자리는 9, 8, 7 … 1, 0까지 이어진다.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점수와 등급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이 구분선은 우리의 행동과 선택, 삶의 가능성마저 규정하고 제한한다. 너무 익숙하여 때로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지만,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 구분선은 여전히 작동하며 우리를 통제한다.

-아픔이 사랑이 되기를 바라요. 백안中


20대 초반, 나는 위와 같은 현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과녁구조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끼지 못한 소수는 그 틈 속에서 제한된 선택만 허용된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가 소수임을 자각하지 못했고, 단지 성실히 노력하면 세상에서 존재할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종종 선배들이 건넨 “머리를 좀 길러보면 어때?”라는 조언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점관리를 열심히 하고, 하루하루 과제와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며, 남들처럼 평범하고 열심히 살아왔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보니, 세상은 뚜렷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 인간과 비인간, 예쁜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대졸자와 비대졸자, 부자와 가난한 자, 성다수자와 성소수자, 서울 시민과 지역 시민, 장애인과 비장애인, 아군과 적군, 정상과 비정상, 공무원과 비공무원.. 이러한 구분은 어떤 집단에 속하든 존재하며,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집단에 소속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어쩌다 운 좋게 집단에 들어간 경우에도 그들에겐 묵시적으로 차가운 폭력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과녁의 정중앙은 허상이다. 완벽한 남성성, 완벽한 여성성이라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과 개성은 타인의 기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문제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수치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완벽한 무엇인가’를 좇으며 외부의 허상을 추앙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외모지상주의와 상업주의가 인간을 상품화하는 시대,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이다. 키가 크거나 작든, 몸이 뚱뚱하거나 마르든, 가슴이 크거나 작든,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과녁의 중심을 향해 달릴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이며,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과녁을 추종하는 것일까?"


세상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희귀한 자원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계급 상승, 돈, 사회적 성공을 통해 불합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는 사회적 폭력을 은폐하고,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다.


이 원리는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제도적 차원의 지원이나 인식 개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라”라고 요구한다. 삶의 기본권이 박탈된 상태에서조차도 개인의 노력으로 과녁 안으로 들어가면 해결될 문제라고 한다, 그들이 현실에서 필요한 이동권, 제도적 지원, 최소한의 안전 보장은 과녁 안에 들어간 극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예로 들며, 중요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나는 이 논리가 지긋지긋하다. 그에게는 제도적 변화와 도움이 필요한 것인데. 노력과 극복을 강요한다는 것이. 그런 사회에선 '평등권'이란 개념이 고려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개념이 있다고 해도, 과녁 안에 이미 들어간 자들만을 위한 개념인 것이다. '전체 사회구성원'을 위한 평등권은 고려되지 않는다.


과녁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사실 과녁의 정 중앙은 공허한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완벽한 남성성’을 지닌 남성과 ‘완벽한 여성성’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치자. 완벽한 남성은 키가 2m 정도에 몸무게는 100kg를 넘지 않고, 격투기에나 나올 법한 강력한 포스를 풍기는 사람이다. 완벽한 여성은 머리카락이 엉덩이를 넘길 정도로 길고, 아이를 낳기 적합한 50인치 골반을 가져 10명의 아이도 거뜬히 출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사람들이 그래야 할까?"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니 키와 몸집이 커야 하고,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것은 추앙받아야 마지않는 일에 속하니까, 정말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단지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일 뿐이다. 모두가 사회가 정한 과녁에서 경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갈 필요는 없다.


과녁의 정 중앙은 앞서 말한 대로 허상일 뿐이다. 각자가 가진 행복과 개성은 오로지 '자기만족'에서 비롯된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수치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벽한 무엇인가’에 집착한다. '혼자가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을 견디기 위해, 완벽한 허상을 추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결혼과 출산의 압박대신에, 다양한 가족구성원을 꾸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가 전체 사회구성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행복 또한 높아지는 길이다. 인간을 한없이 상품화하는 상업주의에 물든 현실은 큰 병폐이다. 인간은 단순히 인간일 뿐이다. 다 같은 인간이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몸이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가슴이 크거나 작거나. 그냥.. 그냥 인간이다. 외모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결국 과녁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과녁은 더 이상 없어져야 할 허상이다.

나는 역과녁의 삶을 살고 싶다, 비록 세상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삶을 살아내어 증명하고 싶다. 증명한다는 감정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세상에는 과녁 밖을 벗어나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 '영원한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존재들. 나 역시도 그들 중 하나이다.


나는 존재 자체로,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 곧 세상에 도전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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