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 : 당신은 과연 어떠한 경계선도 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열심히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경계 없는 평등한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권력과 구조적 차이에 의해 나뉜,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마치 과녁처럼 존재하는 세계이지요. 가장 중심에는 사회적 권력을 꽉 쥐고 있는 권력적인 핵심사상이 존재하고, 그 사상은 주위를 권력으로 전파해 전파시킵니다. 가장 중심부가 10이라면, 옆으로 퍼져갈수록 9.8.7.6.5....1. 그리고 0. 보이지 않는 점수를 매기면서 말이죠. 이 구분선은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만, 사회 속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구분선들은 우리를 규정하고 통제하고 제한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계급을 정해 통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시켜 인간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자극합니다. 포퓰리즘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은 이러한 구분선들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인간과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 직업으로서 표를 얻지만, 오히려 사회적 혐오를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해 나갑니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과 경제적 격차는 보편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 간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존재하며, 동일한 노동을 하더라도 계약 형태에 따라 임금과 복지의 차이가 발생하지요. 정치인들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갈등을 조장하며 노동자들끼리의 반목을 유도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 “정규직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는 프레임을 내세우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비정규직 보호 정책이 당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공포심을 심어줍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정작 문제의 본질인 '불공정한 노동 시장, 노동 성차별, 경제 구조'는 조명되지 않게 되지요. 이 시점 정확히는 2020.7.1일. 노원구청을 첫 발령지로 입사하게 된 제 경우에는, 입사한 1주일 후에, 모 선임으로부터 허위초과근무수당을 입력하라는 동참을 권유받았습니다. “노원구청 근무자(약 1천여 명)들의 90%가 초과근무 부정수령을 하고 있다며, 월 최대 87만 원의 금액을 노동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데, 같이 동참하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동참하지 않을 경우 너는 왕따가 될 것이며, 만약 감사가 걸릴 경우,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동참했다고 말할 경우에는, 그 즉시 공무원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라는 말까지도 함께 들어야 했지요.
아마도 선임은 저를 위해 공무원이라는 노동시장 안에서의 과녁구조를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구의 입장에 따라 기사에 나온 대로, 평균 60세를 웃도는 고령 노동자들이 실제로 근무하는데 쓰는 연간 지급액(20억 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 정규 공무원들이 일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돈'은 한 구청에서만 연간 93억 9천6백만 원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이는 대충 서울시 전체 자치구(25개)만 따지더라도, 연간 약 2300억 원을 초과하는 세금을 지방직 공무원들의 허위수당을 지급하는 게 쓰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이미 월급쟁이가 된 정규직 공무원들은 일할 기회조차 없는 고령의 사회적 약자가 받아야 할 급여를 빼앗아 가는 것이 당연하고, 고용의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보장해 달라는 고령 노동자들의 외침의 목소리가 예비 수험생들에게 ‘청천벽력’이라는 말로 위장되어 보도가 되는 것이 현 대한민국의 시국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덜어내주어야 할 곳이 지방 구청의 역할일 터인데, 그 아픔을 전혀 진화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죠."
제가 들었던 발언은, ‘과연 지금의 우리 사회가 모두가 생계가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진 세상인지’를 심각한 마음으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정답이 내려진 질문이었고, 제가 허위수당에 동참하기보다는 공익제보를 하기로 결심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되었습니다.
'과녁'. 그리고 이러한 구분선은 노동 시장뿐만 아니라 '성별, 연령, 국적, 성적지향'과 같은 다양한 기준에서도 작동합니다.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나 직장 내 차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정치인들은 이를 또 다른 정치적 도구로 활용합니다. 남성들에게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박탈감을 자극하고, 여성들에게는 “남성으로부터 여성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성별 갈등을 초래합니다. 결국 성별 간 갈등이 커지면서 본래 해결해야 할 노동 시장의 불평등이나, 사회적 복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정치인들은 이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지지를 얻는 데에만 집중하며, 성별 대립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주민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문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용됩니다.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정치인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거나 “난민이 증가하면 범죄율이 높아진다”는 식의 프레임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정작 일자리 부족의 원인은 노동 시장의 구조적 문제이며,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정책 실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분노를 외국인에게 돌리도록 유도하며, 그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합니다. 분노한 국민들은 서로를 향해 비난할 뿐,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됩니다. 이는 과녁의 본질인 '정부의 책임'을 가리려는 행동이지요. 이처럼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과녁’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그 과녁의 중심에 위치시키거나 변방으로 밀어냄으로써 지지층을 형성하고 갈등을 조장합니다. 노동자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자국민과 외국인을 대립시키는 것이 그들의 전략입니다. 이들은 분열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지요. 문제 해결보다는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정치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과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바로 과녁의 정 중앙이 어디인지를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당신이 있어서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어울려 피는 꽃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꽃들이 공존할 수 있는 화단이야 말로,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벤담은 주장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요. 그러나, 이 말은 언뜻 보면 모두의 행복을 위한 듯싶어 보이지만 해석에 따라 그 결론을 달리합니다.
바로, ‘행복의 주체성‘의 대상이 수치화됨에 따라 결론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결정론에 따라 소수의 의사까지도 결정지어 버리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현대 민주주의 투표제와도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저는 소수를 끌어안지 못하는 세계란, ‘확장된 사랑‘을 전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단지 존재하는 다수를 위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그곳에 속한 소수는 다수가 누릴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을 동등하게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혼제도, 가족 구성원을 맺고 나의 마지막 여생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동반자를 결정할 권리조차도 박탈되어 있습니다. 다수 중심적인 세계에서는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연대의 끈을 연결할 가능성이 제한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비애감을 주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며 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 일지를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위계가 아닌, 공존과 '사랑'입니다. 이는 '성별, 국적, 연령, 고용 형태'뿐만 아니라,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차이를 만들고 위계를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경계를 초월해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복지 정책 개선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외국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노동 정책과 사회 안전망 강화를 요구해야 하지요.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갈등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안정적인 근로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성소수자를 기독교 교리와 반하는 존재로 간주하며, 그들을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소수자와 성다수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은 특정한 갈등을 조장하려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혐오를 부추기는 문제일 뿐입니다. 신앙이란 사랑과 포용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며,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 집단을 마녀사냥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적 본질과도 어긋남이 명백합니다. 결국, 우리 사회가 논의해야 할 것은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본질을 놓치고, 과녁의 정중앙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신자유주의와 계급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사회 아래에서는 기존 사회의 문제나 갈등들을 지적한다면, 오히려 사회적인 (분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점점 드세게 튀는 사람(낙오자) 취급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잃기를 강요받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인들이 만든 구분선 속에서 서로를 길들이려 하거나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하고, 또 연대해야 합니다. 함께 목소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녁 안에 들어가기를 아등바등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녁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서로에게 비애감을 주고 상처를 주는 세상이 된 이유는, 과녁의 정 중앙에서 나오는 위계와 혐오의 목소리들을 아무런 제재 없이 방치해 둔 결과입니다. 우리의 분노를 정치인들의 이익에 동조하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함께 더 밝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힘이 되도록 바꾸어 가는데 써야 합니다.
아픔이 사랑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는 언제나 제가 속한 곳이 어디든, 그 과녁의 정중앙이 무엇이고 어디인지를 직시하려 합니다. 그리고 과녁을 선망하는 삶이 아닌, 그것을 웅변함으로써 내가 있는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는 현상에 이어, 믿음과 사랑을 통해 아픔이 천천히 사랑이 되어간 이야기들을 써 나가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