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의 피리부는 사나이
나는 유모차에 존을 태우고 몇 시간이나, 몇 시간이나 걸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총명한 젊은 여성이 하루 종일 작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다. 나는 유모차를 밀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분노와 애정,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 Mother reader: Essential writings on motherhood> p24 - 모이라 데이비 엮음
"어머! 하레야!" 하고 또 낯선 사람 2명이 유모차를 끌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조금은 경계하며, 나도 인사를 한다.
오른쪽에 있던 여자가 '누구야?'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왼쪽에 있는 여자가 '그 왜~'하고 눈으로 대답한다.
오른쪽 여자는 '아하!'하는 표정을 짓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구석구석 알고 있다는 건 스트레스다.
대인기피증에 걸리는 연예인들의 심정을 이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레가 살던 곳은 서울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신도시에 있는 작은 아파트단지였다.
신혼부부가 많아 유아 비율이 높았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을 본 건 처음이다.
처음엔 아이를 키우는 분위기의 동네 자체가 너무 낯설었다.
말도 안통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외국의 도시에 살던 때보다도 더 적응하기 힘들었다.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아이를 하나씩 품에 안고 다니는 엄마들이 일상의 풍경이었다.
마치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새끼를 애지중지 보살피는 엄마 동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작은 새끼 하나를 소중하게 품고 다니고 있다니, 신기했다.
작은동네에서 하레 엄마, 아빠의 이혼, 하레엄마의 잠적, 하레의 변화는 꽤 떠들썩한 이슈였다.
바깥에 나갈때마다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훑어보기도 했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놀이터에 가면 하레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고, 엄마들은 정자에 앉아서 아이들을 향해 시선만 고정한채 간식을 먹거나 수다를 떨곤했다.
나는 엄마들을 향해 인사만 한 뒤, 하레랑 같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하레에게 친구들이랑 노는 법, 놀이터에서 차례를 지키며 놀이기구를 타는 법 등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또 나만 보면 다들 자꾸 '괜찮냐'고 물어봐서 기분이 다운되는 것도 싫었다.
정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동네다보니, 나와 하레의 이야기가 가쉽처럼 소비되는 것도 싫었다.
나는 함께 욕할 남편도 시부모도 없고, 하레엄마에 대해서 자꾸만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첫 아이라도 최소 3년이상 아이를 키운 엄마들과는 달리 이제 겨우 쩔쩔매며 아이와 합을 맞춰가고 있으니, 대화할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레랑 놀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이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오듯 내게 몰려들었다.
그네도 밀어주고, 꽈배기 그네도 태워주고 숨바꼭질하고, 술래잡기 하고, 미끄럼틀타고 이것저것 하다가 놀거리가 떨어지면 화단에 가서 식물이나 곤충 관찰을 했다.
어느 날은 근처에 민들레 씨앗이 있길래 그걸 따서 '후' 불고 '흔들흔들'하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엄청 즐거워해서 아파트단지의 모든 민들레 씨앗을 찾아서 불고 놀았다.
나중에는 아이들의 초등학생 형들까지 다같이 모여서 놀았다.
이렇게 아이들이랑 한바탕 놀고 집에 들어오면 지쳤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파트단지 놀이터를 피하고 자전거를 사서 하레랑 근처의 산이며 들이며 연못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어린이집에서 하루종일 또래 친구들이랑 잘 노니까 마치고는 나랑만 좀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지 싶었다.
하레의 인생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이혼 당사자들은 어찌 느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혼의 상처'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까짓껏 평균수명도 늘어난 현대 사회에서 이혼한 게 뭐 대수야? 싶은 마음이었다.
자아가 한창 발달할 시기의 하레를 주변 어른들이 자꾸 '엄마없는 불쌍한 애'로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 하레의 밝고 똘똘한 원래 모습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모여 서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 잘 이해가 안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저렇게 많은거지?
그래도 엄마들은 나를 길에서 만나면 "오늘 우리 ㅇㅇ놀이터에서 놀 거에요. 그쪽으로 오세요!" 하고 살뜰히 초대해 주었다.
아이들 사이에 수족구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는 내 연락처를 모르니 아파트 인터폰으로 연락해서 단톡방에 초대해 주기도 했다. 그런 '병'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아이들의 '이모'가 되었다.
'시스터후드'라는 게 저기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꾸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싫었던 건, 사실 안 괜찮아서 괜찮아 지려고 기를 쓰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중에 정말 다 괜찮아지고 생각해보니 사람들도 걱정은 되는데, 뭐라고 위로해야할지 몰라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렀던 것 같다.
결국 사람을 주저앉히는 것도 사람,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사람인 것 같다.
2020년 1월.
'우한 폐렴'이라 소문만 들려오던 코로나가 급기야 한국에도 상륙을 하더니,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됐다.
주말에 집에 와서 밀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탄내가 났다.
'옆집에서 냄비를 태우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서 창 밖을 내다보니, 소방차2대가 도착해 폴리스 라인까지 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계단으로 무장을 한 소방관 아저씨가 장도리같은 걸 손에 들고는 현관문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올라오고 있다.
"이 건물에 불이 난거에요?"라고 묻자, 옆 집 문이 열린다.
자기가 신고했다고 한다. 아까는 건물 전체에 연기가 자욱했다고.
"그럼 우리 이제 '도망'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다행히 별 일이 없이 소방차는 철수했지만,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도망'이라니...
그런데 집에 들어와서도 '대피'라는 단어가 한동안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말이 늦은 4살 남자아이와 매일 같이 지내다보니 어휘가 매말라 있었다.
"꺄아~ 공룡이 온다! 도망가자!!" 수준의 대화만 매일 주고 받았더니 말이다.
오래 안쓰면 외국어만 까먹는 줄 알았더니, 모국어도 줄어드는구나...
2020년 2월 말, 코로나 확진자가 35명 남짓했을 때였다.
코로나로 인한 오랜 가정보육 후, 어린이집에서 졸업전에 미뤄졌던 아이들 생일파티를 몰아서 하던 날이었다.
오랜만에 어린이집 앞 놀이터에 엄마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마침 5세가 되어 이제 가정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하레네반 엄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변훈련'이 가장 큰 화두였다.
서로 이런저런 노하우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제 나도 같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애들도 알아서 잘 놀겠지, 싶어 가끔 확인해 가면서 엄마들이랑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와 '또래 사람'을 만났더니, 엄마들과 동그랗게 둘러선 채 거의 숨도 안쉬고 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이런 거였구나!
저 멀리, 아이들은 어제 내린 눈과 얼음덩어리를 서로 집어던지며 놀고 있었다.
하레가 놀이터에서 딸과 놀고 있던 어떤 아이아빠에게 눈을 뭉쳐 던지며 깔깔 거렸다.
그 아빠는 매우 짜증이 난다는 듯이 우리 쪽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하루종일 아이랑 집에 있어야 하는 엄마들은 너무 '대화'가 고프다.
지금까지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엄마들과의 대화에 끼여 있는 게 그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답도 없어 보이는 공통의 육아상황들에 대해서 서로 그냥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울 수도 있는 거구나'하고 느꼈다.
딱히 해결점이 도출되지 않아도 괜찮다.
같은 일을 겪고 있는 '또래 사람'들과 한바탕 떠들고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보낼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였구나.
하레의 바지에 뭔가 얼룩덜룩한 게 보였다.
'쉬가 마렵다'고 하면 집에 갈 것 같으니까, 말을 안하고 그냥 바지에 싼 거 같았다.
'미끄럼틀에 쌌다'고 했다.
"하레야, 바지 젖었어. 집에 가야돼. 놀다가 쉬가 마려우면 '고모 쉬마려워요'하고 이야기 해야지!"하고 친구들과 인사하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땐 우리 모두 몰랐지.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