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enough mom
어머니라는 입장은 여자들을 침묵시킨다.
여자들의 크립토나이트 낱말들은 '뚱뚱하다', '난잡한 년', '나쁜 어머니', 그리고 '이기적이다'이다.
그런 말들은 마치 슈퍼맨의 힘을 빼앗는 크립토나이트처럼 우리의 힘을 빼앗아간다.
<끊임없는 변동: 절반쯤 변화된 세계에서 성, 일, 사랑, 아이들, 그리고 삶 위에 떠 있는 여자들 Flux: Women on sex, work, love, kids and life in a half-changed world> - 페기 오렌스타인
요즘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그런지 콧물을 안흘려요. 전엔 툭하면 콧물을 흘리더니.
유치원에 하레를 등원시키고 같은반 엄마와 만나 집으로 걸어오던 중이었다.
순간, '아! 그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아이가 콧물을 흘리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코로나로 계속 유치원 입학이 미뤄지며 가정보육을 하던 때, 면역력 높인다고 엘더베리, 홍삼, 배도라지, 키즈 멀티비타민 등 이것저것 챙겨 먹였다. 매일 바깥에서 잘 뛰어놀고 콧물도 안흘리고 밥도 잘먹고 컨디션도 좋아져서 '내가 잘해서' 그런건 줄 알았다.
"도대체 하레 콧물은 언제 멈추죠? 콧물 그쳐서 안심하면 기침 시작하고."하고 푸념했더니, "5살쯤 되면 좀 좋아질거에요."라고 했던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면역력 약한 유아들이 모여 있으니 툭하면 감기에 콧물에, 콧물이 다른데로 넘어가서 기관지염, 중이염, 수족구까지 사계절 내내 마음을 졸였다.
동네에서 진료 잘하기로 유명한 병원은 접수하면 기본 대기가 1시간이니, 아이가 아프면 병원갈 생각에 스트레스였다.
약을 몇 주째 먹어도 나을 기미가 안 보일 때면 또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건 아닌가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아이가 낫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도 꼭 덩달아 아프곤 했다.
이 사이클을 몇 번이나 안달복달 반복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은 아이는 나랑은 상관없이 크면서 그냥 아플때되면 아프고, 나을때 되면 낫는다는 것이다.
그게 제아무리 감탄스러워 보인다 해도, 당신이 자기 생명을 다른 이에게 바치고 싶어 하는 열망은 어느 면에서 당신 자신의 생명이 당신에게 맡겨졌을 때 그걸 갖고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어.
자기희생이란 회피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p93 라이오넬 슈라이버
우리엄마는 가족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들을 혼자서 꾹꾹 참다가 화산처럼 주기적으로 폭발하곤 했다.
내가 얼마나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줄 아냐고.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참고 있는 줄 아냐고.
켜켜이 쌓였던 불평불만들을 쏟아내며, 칼리처럼 분노해서 날뛰곤 했다.
하레가 3살부터 7살이 될때까지 '최소 4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돌보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등한시하고 '하레만'을 위해서 살다가 혹시라도 엄마처럼 날뛰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단 나부터 나를 잘 챙기기로 했다.
내가 제 발로 왔으니 '최선'을 다하되, '희생'하지는 않으려고 했다.
하레의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면서 하레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 다시 내 일과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꾸물거리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유모차에 실어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냅다 뛴다.
현관에서 들어가기 싫어하는 아이가 혹시나 '나를 여기에 버린다'고 느끼지 않도록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앉아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문이 닫히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집으로 다시 달려온다.
이미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아이랑 놀고난 뒤라 체력은 방전된 상태지만, 거실에 널부러진 장난감과 책을 치우고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나면 한 시간이 후딱간다.
집안일은 해도해도 끝도 없다, 어느 선에서 적당히 멈춰야 한다.
자리에 앉아서 일을 시작한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우왕좌왕되다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읽고 쓰고 정리하고 이제 좀 '궤도에 올랐다' 싶으면 4시다.
픽업 알람이 울린다.
하, 가기 싫다.
하레랑 만나서 노는 게 좋으면서도 싫다.
이런 생각을 드는 것 자체가 너무 '죄책감'이 든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놀이터에 간다.
아이들이랑 논다.
집에와서 간단히 간식을 먹이고 아이와 또 놀다가,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씻기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재운다.
그렇게 내 하루가 다 지나간다.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날은 마음이 온통 다른데 가있고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어린이집 새학기 준비기간에 설문조사로 등원여부를 확인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맡겨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원 시간에 데리러 가보니 하레 혼자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내가 가자마자 달려들어 안기는데,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엄청난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다른 아이들은 다들 집에서 엄마랑 보내는건가?
과연 '내 일' 하자고 이게 맞는건가?싶고 또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회로를 돌려도 결론은 같다.
내가 하루종일 데리고 있는다고 해서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보살펴주는 것보다 더 나은 돌봄을 제공해준다는 보장도 없다.
혼자서 차분히 생각하거나 내 일을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일단 나부터 너덜너덜해질거다.
그 상태에서 하레에게 100% 몰입해서 공감해준다거나, 즐겁게 놀아주는 걸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마치 아이를 어디다가 버리고 온듯한 죄책감은 끈덕지게 나를 따라다녔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 확실한 단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구나 그렇다.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 안 알설렝 슈창베르제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어렵다.
누군가 우리를 소유하려고 할 때 우리는 강렬하게 저항하지만, 가까운 관계에서는 죄책감이 작동한다. 그 사람이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마치 사랑의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의 욕구를 들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심지어 부모라고 해도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정도로 희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 p218 롤프 젤린
금요일 저녁 하레아빠가 퇴근하면, 저녁을 같이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 밤에 집으로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다시 하레네 집으로 오곤했다.
주말엔 아이 뒤치닥거리 할 일 없이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고,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차분히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2주만에 집에 가던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오늘은 집에 가는 날이야!'하며 기분이 좋았다.
뽀로로 동요가 하루종일 왱알왱알 울리는 이 집을 잠시 떠나 조용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그러면서도 그 '홀가분함'을 느꼈다는 게 또 미안했다.
"하레야, 고모 집에 갔다올께. 두 밤 자고 올게. 고모 갔다가 올거야. 내일은 아침에 두두다다 일어나서 고모방에 와도 고모 없어."
내가 주말에 집에 갈 때면 하레는 알아 듣는건지, 마는건지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됐다.
급기야 내가 자리를 비우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다음주엔 전혀 괜찮지 않고 울고 싶은데 울지 않으려고 눈도 안 마주치고 딴청을 피웠다.
차라리 떼쓰고 울면 마음이 덜 아플텐데.
서울로 올라오는 밤버스 안에서 하레의 표정이 창 밖의 달처럼 나를 괴롭히며 따라왔다.
만 3세 이전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게 '치명적인 분리'를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거라는데, 한 번 상처받은 아이에게 지금 내가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가.
그냥 가지 말고 있어야 하나??
그래도 '장기적으로'보면 일단 내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아야 평일에 하레를 더 잘 돌볼 수 있어.
하레도 고모는 가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와서 나를 예뻐해준다,는 걸 배울 필요가 있어, 라고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다잡곤했다.
내가 갔다오면 하레는 조금 새초롬해져 있다.
마치 마음을 열었다가 다시 상처받기 싫어서 닫아 걸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오길 기다린 것 같고, 온 게 반가운 것 같은데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오히려 아빠 옆에 앉아서 무뚝뚝하게 TV만 봤다.
그렇게 하레를 놓고 온 주말에는 아무것도 손에 안잡히고 빨리 내려가서 하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하레 먹을거리랑 옷만 사러 다니기도 했다.
이 시간들도 결국 잘 지나갔지만, 그땐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건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거의 자학에 가까운 죄책감에 시달리던 시기에 롤프 젤린의 <예민한 아이의 특별한 잠재력>이라는 책을 운명처럼 만났다.
부모와 아이는 얽혀있는 관계가 아니고 마주 보는 관계라고 했다.
아이와 마주보면서도 자신의 안녕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
부모와 아이의 이상적인 경계선은 양쪽 모두가 편안함을 느끼는 지점이라고 했다.
어떤 양육원칙보다 효과적인 것은 부모가 자신의 경계선을 존중하며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하레는 즐겁지만 내가 '편안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도 이상적인 관계가 아닌 것이다.
또한 타인을 위하느라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은 예민한 사람의 가장 큰 위험요소라고 했다.
여성의 경우 이런 자질이 헌신적인 아내, 어머니라고 생각되어 장려되는 경향까지 있는데 심한 경우 나중에 남편이나 아이를 위하느라 자신을 버리는 위험까지도 감수하기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을 우선해서 돌보며 일정 정도 타인의 삶을 대신 사는 경향이 있다고.
우리는 제2의 누군가가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을 잊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최고의 선이 되려 하지 말고 사악한 것보다는 나아져야 한다고 요구하라.
매일 자신의 악덕을 줄이고 자신의 실수를 비난한 것으로 족하다.-세네카
전엔 뭘 하던 '최상' '최고'를 나에게 요구하며 스스로 지쳤다면, 이제 그저 내 능력안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매일 악덕을 줄이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한 걸로 됐다,고.
예민한 성향의 어머니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아이를 돌봐주면 부담을 덜고 느긋하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가?'라고 했다.
아이와 스스로에게 완벽과 완벽한 상황을 기대하고, 타인이 자신의 그 기준에 못 맞출때 언짢아 하면서 자기가 '다' 하려고 하는 성향, 그거 나에게도 분명히 있다.
하레는 어린이집에서 좋은 선생님들에게 사랑 넘치는 보살핌을 받고 있다.
그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도록 하자.
하레가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빠, 나, 하레 우리 각자 '자신만의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다.
나에게도 살아야 할 내 인생이 있다.
나 자신의 소망이 충족되지 않고 충만감이 없다면 내 인생에 소홀한 것이고, 그래선 하레에게도 잘할 수 없다.
특히나 예민한 사람은 혼자 조용히 성찰한 공간이 매우 중요한데, 나 역시 그렇다.
혼자서 생각하고 그 날 받아들인 정보를 생각하고 곱씹고 '수동'으로 처리해서 소화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괜한 책임감으로 하레와 하루종일 달라붙어 있으면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히스테릭해지느니, 어린이집 보육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는 내 시간을 보내고 상쾌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하레에게 100%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마음이 가뿐해졌다.
이렇게 가뿐해진 내 마음을 알아 채기라도 한듯 하레는 그 날따라 유독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새 부쩍커서 쫄티가 되어버린 스누피 맨투맨을 입고 빨간 사과볼을 하고 뛰어노는 하레가 너무 예뻤다.
아파트 같은 동에 아이 4명을 키우는 엄마가 있었다.
첫째아들이 7살 정도, 둘째는 5살정도같다. 여기까지는 터울이 괜찮은데, 문제는 둘째와 연년생인듯 보이는 쌍둥이 동생 2명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엄마는 아이 넷을 옹기종기 세워두고 늘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구두에 가방까지 든 걸 보면 아이들을 보내고 출근까지 하는 워킹맘인 모양이다.
아이들은 아침마다 등에는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각자 손에 작은 사탕이며 젤리봉지를 들고 먹고 있었다.
그렇게 입 안에 간식이라도 들어 있어야 아이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거나 머리를 묶어주고 옷매무새를 만져주면서도 혹시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 눈치를 은근 살피는 것 같았다.
누가 감히 이 엄마에게 "아침부터 아이에게 사탕이나 젤리를 먹이는 건 좋지 않아요."라고 할 수 있겠나.
큰오빠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게 동생들을 챙기고,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엄마를 따라 걷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소리없는 응원을 하곤 했다.
괜찮다면 힘내라고 다가가서 그 엄마를 한 번 포옥 안아주고 싶었다.
나의 엄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엄마마음은 그게 아니었을거다' 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말하는 '2차가해'를 당한 것 같은 상처를 입곤 했다.
내가 받았던 상처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게 더 아팠다.
(엄마가 나를 죽이려고 따라 오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꿈도 그런 상처에서 나온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좋은 엄마일수록 더 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어 했던 이유가 바로 엄마라면 누구나 갖는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면 어쩌지?'하는 '죄책감'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제서야 나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력한 아이들에게 죄책감은 수치심에서 오는 무력감에 견주면 훨씬 강력한 감정이다.
죄책감을 느낄 때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통제력과 힘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내면에서 느끼는 부적절한 수치심은 무력감의 최종점일 것이다.
아이들은 무기력한 자기 세계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부적절한 죄채감을 느끼거나, 언제라도 자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 상태에 빠진다.
아이가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나 때문에 생긴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아이는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화를 냈다면 사과하고 잘못한 점을 고칠 수 있다. 최소한 자신의 화난 감정에 통제력을 갖는 것이다.
<거인과 카멜레온 Shame and Guilt : Master of Disguise> p128 케이트 미들턴-모즈
그러고보니 나는 '불필요하게 지나친 죄책감'을 느끼는 일에 관해서도 해결해야 할 '이슈'가 있다.
역기능 가정 속에서 지나치게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애늙은이같은 아이들이 이 문제에 시달리는 게 흔하다고 한다.
내가 더 잘해서 집안의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들고 싶다,는 아이로서 불가능했던 일이 번번이 좌절되어 수치심을 느꼈던 아이는 커서도 모든 상황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다.
어려서 느낀 쓰라린 수치심을 재경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차라리 '힘'을 주는 감정인 '죄책감'을 느끼는 편을 선택한다고 한다.
어쩌면 내 인생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서 나는 '자동적으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앞으로 좀 더 주의깊게 내 감정의 패턴을 들여다 봐야지, 생각했다.
또 금요일 밤이 됐다.
하레의 작고 통통한 손에서 따스한 온기, 보내기 싫은 아쉬움, 같이 있어서 좋음 같은 많은 것들이 전해져왔다.
"고모 집에 갔다올게. 두 밤 자고 올게."하자 "으응~~"하고 대답했다.
"너 지금 고모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라고 해도 "으응"했다.
다행히도 "안녕"을 해주며 울지 않고 의연하게 보내줬다.
"하레야, 고마워."하고 오른쪽 볼에 뽀뽀를 해주고 집을 나섰다.
정말 고마웠다.
또 마음은 무겁게 머리는 생각으로 터지면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하레와 나의 애착은 이미 잘 형성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이 관계를 소중히 가꿔나가는 일만 남았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로 하레가 심각하게 망가질수도 있다는 오만을 버리자 한결 육아에 자신감이 생기고 하레의 개인성을 더 존중하게 되었다.
하레가 되어야 할 그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리고 나도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쩌면 나만 하레를 돕는 게 아니라, 하레도 나를 돕고 있다.
우리는 서로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돕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쪼꼬미 귀여운 파트너 하레.
거절할 수 있는 권리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특히 다른 사람들을 돕거나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거나 에너지가 다 소모돼버린 사람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가르쳐주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해야할 역할이 있지만,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면서까지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 크리스천 작가가 지적했듯이, 예수는 자신이 유대의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까다롭고 예민한 내 아이, 어떻게 키울까? The highly sensitive child> p100 일레인 아론
하레를 잘 키우는 일, 운동, 주말의 여가, 친구와의 만남, 공부, 일 뭐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줄이고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이 몇 달을 돌리다 보니, 몸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얼굴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좁쌀 여드름이 빼곡하게 돋아나기도 하고, 가위눌림과 악몽에 시달리고, 감기가 낫질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걸 제외하고 '놓아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 인간관계도 정리했다.
일도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정리했다.
컨디션, 체력을 위해 몸매관리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엄마들의 비애는 아이를 위해 가끔 나 자신까지 놓아야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를 너무 뒷전으로 밀어두어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한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먼저 내가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
자기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강한 사람만이 흘러 넘치는 사랑을 아이에게 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날뛰던 나의 엄마는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낮은 자기가치감과 불안을 느꼈던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부모의 역할은 자신을 죽을 때까지 업그레이드하면서 자식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그래도 힘든 그 임무에 '죄책감'이라는 자기고문까지 더하지 않아도 좋은 거 아닐까?
좋은 엄마가 되는 일에 과연 정답이 있나?
밤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까 좀 더 잘할걸.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미안하다.
생각하고 다음날 같은 행동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쩌면 이미 충분히 좋은 엄마 good enough mom인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