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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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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14. 2020

6. 부모의 이혼 후, 다시 마음을 열기 시작한 아이

하레가 언제부터 이렇게 급격히 어두워졌을까? 


불과 몇 개월전, 이 집에 이사오기 전까지만 해도 구김살 없이 햇살처럼 밝은 아이였는데.

지금, 하레의 상태는 너무 충격적이다.




내가 오기 전까지 하레아빠는 일주일간 직장에 휴가를 내고 하레를 돌보고 있었다. 이 날은 아빠가 다시 출근을 시작하고, 나랑 하레랑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


하레는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내가 다가가면 같이 조금 놀다가도 '아 맞다, 우리 안 친하지?'하면서 다시 냉정하게 돌변하곤 했다. 아빠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레아빠도 이혼 후, 감정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하레를 돌보려니 둘은 주로 TV를 틀어놓고 거실에 좀비처럼 널부러져 있곤 했다.


아침 6시 반, 

방에서 새벽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거실에서 심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하레는 계속 콜록거리고 하레아빠도 침대에서 이불을 다 걷어내며 아이가 토하는 걸 받아내고 있었다.


전날 저녁에 끓여두었던 둥글레차를 데워서 하레에게 먹였다.

기침을 하고 토하는 게 둘 다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아무 일 아니라는듯이.

아이가 아파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하레는 잦은 입원 후에도 계속 병원을 오가며 약을 달고 살았다.

기침하면서도 뒹굴거리면서 태연해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호기롭게 '하레를 내가 돌보겠다'고 내려왔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안좋은 하레와 하레아빠를 보고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거즈 손수건을 한 다발 가져다가 하레의 얼굴과 콧물, 젖은 몸을 닦아주고 또 토하는 걸 받아냈다.

이날 세탁기를 3번이나 돌렸다.




아빠가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가려고 하자 하레가 눈썹이 빨개지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방 체념한듯 기운없이 울음을 그쳤다.


"아빠 일하러 갔다올께. 금방 올거야."라고 하레아빠가 말했다.

내가 "고모랑 같이 있을거야. 아빠, 빠이빠이해."라고 하자 울면서도 빠이빠이를 했다.

너무 침울한 분위기에...같이 다운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동생에게 걱정말고 다녀오라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이날, 집을 나선 하레아빠도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울었다고 한다.


하레는 아빠에게 매달리거나 울지도 떼쓰지도 않고 그냥 체념한듯이 다시 상어인형을 꼭 끌어안고, 슬픔을 억누르는듯이 누워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아침부터 토를 해서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일단 혼자 자기 안에 침잠해 있는 아이를 '바깥'으로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소리로 TV에서 나오는 뽀로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발부터 주물주물 올라가면서 천천히 다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하레의 발에 뽀뽀를 해주고 양쪽 발을 손으로 잡고 리듬을 맞추면서 흔들었다.

자꾸만 눈을 피하는 아이를 따라 다니면서 웃었다.

하레가 좋아하는 귤을 까서 먹여 주었다. 아이가 누워 있는 매트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장난을 쳤다.


드디어 하레가 일어났다. 

층간소음 때문에 뛰면 안되지만, 하레는 좀 뛰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막 뛰어다녔다.

하레를 일으켜야지, 하는 생각에 오도방정을 떨면서 온 집을 뛰어다녔다. 두두두두하면서 하레를 따라가는 척을 하고, 도망가서 숨었다가 하레가 나를 잡으러 오면 막 소리를 꺄아꺄아 질렀다.


내가 온 이후, 내내 누워 있기만 하던 하레가 갑자기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같이 뛰면서 까르르  웃었다.

팔을 벌려 나에게 와서 안기고 업히기도 했다.


완전히 아이에게 몰두했다.

계속 쳐다봐주고,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칭찬해주고, 말 걸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춤추고.


동영상으로 찍어서 하레 아빠에게 보내자, 신기해하며 걱정을 한시름 놓는 듯했다.


"하레, 씨리얼 먹을까?"하고 씨리얼 봉지를 흔드니까 "떼(네)!!"하고 대답했다.

말을 걸어도 항상 무표정, 무반응이다가 처음으로 대답을 해줘서 기뻤다.


한 그릇을 다 먹고 우유까지 싹 마시고는 양치질을 하고 물을 뱉으라고 하니까 "풰!"하면서 배가 다 젖게 뱉고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이 세수를 어떻게 해줘야할지 몰라서 손수건을 따뜻한 물로 적셔서 닦고 로션을 바른 뒤,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 입혔다.


처음으로 하레가 슬픈 눈빛 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즐겁게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아이의 웃음이란 엄청난 보상이구나, 하고 느꼈다.

희망이 보였다.




어린이집 하원 후, 하레의 기침과 콧물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빵집에 들렀다. 하레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 난장판이 된 집을 청소하느라 애썼더니, 슈크림이라도 먹고 힘을 내고 싶었다.

하레가 킨더조이를 사달라는듯 소리없이 손으로 가리키길래, "슈크림 같이 먹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나왔는데, 아이가 소리도 못내고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울었다. 마치 누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겁에 질린 눈으로.


3살짜리 아이가 울면서 떼를 쓰고 드러누워도 모자랄판에 왜 이렇게 소리도 못내고 우는 걸까. 가슴이 무너졌다. 다시 들어가서 킨더조이를 샀다. 



아침에도 어린이집에 가자고 하니, 마치 군인처럼 절도있게 갖고 있던 장난감을 '착' 내려놓길래 좀 놀랐다.

자전거에 타라고 하자, '착' 올라탔다.

병원에서 콧물 석션을 하는데도 움찔 한 번 안했다.

그 행동들에서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오도방정이라도 떨지 않으면, 아이는 상어 인형을 안고 누워 있기만 한다.

일어나서 느릿느릿 뭔가를 하다가 생각대로 안되면 분노를 폭발하듯 짜증을 내며 바닥을 내리치면서 운다. 엄마가 분노발작하는 걸 보고 배운건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표출해야 되는지 몰라서인건지 모르겠다.

얼굴에 늘 그늘이 져있다.

혼자서 슬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짜증을 잘내고 폭력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 놀고 있을 때 뭐하냐고 말을 걸며 다가갔더니 짜증을 내며 무거운 공룡 피규어로 내 손을 내리 찍었을 때는 아일랜드 식탁 뒤로 가서 후-하며 나를 조금 진정시켜야 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은영 박사님의 말이 생각났다.

문제 아동을 교정하는 첫 번째 비결은 '세심한 관찰'이라고.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레는 '아빠'가 나와서 같이 놀아주는 유튜브 채널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걸 틀어달라고 해서 혼자서 그걸 똑같이 따라하면서 놀았다.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혼자 노는게 익숙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나와서 놀아주는 동영상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조금 움직이고나면 피곤하다는듯이 또 상어인형 위에 털썩 누웠다.

상어인형을 안고 손으로 털을 만지작 거리면서 하리보 미니젤리 한 봉지를 입에 다 털어넣고 멍하니 허공이나 TV를 본다.

몸만 여기 남아있고 정신은 아득하게 저 멀리 멀리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난감 놀이를 할 때도 상어를 쇼파위에 올려놓고 놀다가 가서 상어를 한 번 안고, 다시 와서 놀고, 가서 상어 위에 올라타서 얼굴을 부비고, 다시 놀이를 했다.


밥은 '김'만 싸서 먹는다. 

팬트리에 남아있는 아이 음식이라곤 인스턴트 사골육수(그것도 국물내기용), 김, 뽀로로 짜장 컵볶이가 다였다.


어린이집 키즈노트 글도 처음부터 하나 하나 읽어봤다.


오른쪽 구석에 혼자 누워있는 하레 


어린이집에서도 하레는 구석에 혼자 기운없이 누워 있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서 놀다가 친구들이 곁에 오면 화를 낸다는 내용도 있었다.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혼자 남으면 심심해해요.'라면서 '하원시간을 잘 맞춰주세요.'라는 내용을 선생님이 에둘러 표현한 것도 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왔는데, 집에 가기 싫다고 울면서 선생님한테 매달려서 선생님이 속상했다는 글도 있었다.


엄마와 단 둘이 있던 집에서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생활'을 했던걸까?

하레아빠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하레엄마는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느라 없고 보일러실 문 앞에 수북히 쌓인 장난감과 함께 하레가 혼자 놀고 있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아빠가 집에 오면 무슨 '구세주'라도 본듯이 달려나와서 아빠에게 매달렸다고.

 


해리할로우의 원숭이 애착실험


해리 할로우의 애착실험 속 아기원숭이같이 하레는 '살아남기 위해서' 상어 인형을 부둥켜 안고, 쓰다듬으면서 얼굴을 부비며 혼자서 아빠가 올때까지 씩씩하게 견뎠구나. 마치 늑대소년처럼. 그래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법도, 감정을 주고받는 법도, 같이 노는 방법도 모르는 거구나. 엄마,아빠가 싸워서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기댈 곳 하나 없을 때도 상어인형에 매달려서 너는 혼자서 그렇게 슬픔을 견뎌온거구나.

하레는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오면 TV와 유튜브, 상어인형과 함께 혼자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에 가기 싫다고 서럽게 울었던 거구나.





40년 뒤 부코바르의 아이들에게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너무 얌전했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립된 채로 있었고, 거의 놀지도 않았고, 엄지손가락을 빨았고, 제 머리카락을 씹었고, 움직일 때 두 팔을 움직이지 않았고, 시선은 한 군데 고정되어 있었고,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이런 모습을 통해 그들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부정적 의식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나름대로 삶에 적응한 방식은 바로 단조로운 행동양식이다. 정신적 공허는 그들에게 일종의 방어이다. 만약 누군가가 너무 따뜻하게 그들을 대하면, 감정적으로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그들은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로마에서 3년간 거리의 아이로 살다가 시설에 수용된 조르조에게, 마음 좋은 보육원 교사가 자기 아들의 비행기 장난감을 주었다. 그는 미친 듯 좋아하며 이 장난감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지만, 그 감정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는 장난감 비행기를 내동댕이치더니 벽 모서리에 대고 발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 이런 행동 양태를 보인다. 행복을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통과의례가 전혀 없었던 아이의 경우, 행복은 불안과 잇닿아 있다. 까르르 웃다가도 그 웃음이 길어지면 울기 시작하는 어린 아기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더 평범한 예를 들자면, 놀던 아이가 점점 흥분하여, 치솟는 감정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친구를 마구 때리는 경우도 이와 같다. 물이 솜을 적시듯, 환경은 아이를 적신다. 환경이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면 아이는 고통받지 않으려고 자신을 비워버린다

이는 마치 무서운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아예 의식을 잃거나 얼굴을 가려버리는 어른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아이는 감수성이 깨어날 때, 그 감수성을 적절히 다스리는 법을 미처 배우지 못한 상태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고통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비워버린 아이일수록, 행복한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의 밀도는 더 높다. 이때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와락 껴안거나, 상대에게 가서 부딪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 반응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그 상대인 어른의 해석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이런 아이를 가치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괴물을 위해 교육적인 회로를 만들 것이다. 아이는 서로 싸우는 법을 배우면서 그 회로에 적응해간다. 그러나 이 아이가 넘치는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교육자라면, 아이의 두려움을 탈바꿈시킬 만한 장소를 제공해줄 것이다.


<불행의 놀라운 치유력 Un Merveilleux Malheur> p.88  보리스 시륄니크




상어인형을 그동안 얼마나 안고 다녔던건지 털이 다 떡이진채 누워 있었다. 다음날, 하레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 하레의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상어인형을 세탁해서 건조기까지 돌려놨다. 내가 주방에서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하레가 상어 인형을 안고 다가오길래,


아 예쁜 냄새!! 예쁜 냄새나지?

하고 하레가 안고있는 상어인형에 코를 파묻어 킁킁거리고는 하레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별처럼 반짝이던 하레의 눈이 '그래? 고모도 상어 좋아해? 나도 좋아하는데!!! 내 친구야!! 지금까지 내 유일한 친구였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반응하고 웃고 말해주는 사람이 생긴 게 신기하고,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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