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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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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14. 2020

5. 드디어 이혼,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한 년은 정상인 코스프레하고 나는 행복한척 멀쩡한척 하면서 살았는데 
다들 알고 있었더라고. 누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내 이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히려 응원해주더라.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된 기분 ㅋㅋ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몇 개월이나 마음 졸이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동생이 이혼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

하레아빠의 이혼은 주변사람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반려기간이 지난 후, 합의이혼 절차가 드디어 마무리됐을 때 우리는 케이크까지 사다가 이혼축하파티를 했다.  


"진작 오만정 다 떨어졌었어도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참았는데, 자기는 '더이상 애가 예뻐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그 소리 듣고 이혼하기로 결정했어."




엄마, 아빠가 이혼할 무렵, 하레는 병원에 3번이나 연달아 입원을 했었다.

예전엔 "하레가 입원했어."라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부터 덜컹 내려앉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손에 안잡혔는데 "또?"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래 애들은 그렇게 아프면서 크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입원이 너무 '잦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하레가 병약 미소년 캐릭터도 아닌데.


하레엄마가 실질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그저 '아이를 잘 키우는 완벽한 엄마'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감안하면 어차피 보험으로 커버가 되니까 툭하면 아이를 입원 시키는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아이의 식단도 매우 극단적이어서, 어떤 날은 성대하게, 어떤 날은 양념도 안된 라면면만 먹이는 것도 몇 번이나 봤다.


좋은 엄마, 잘 먹이는 엄마, 그래서 애기 식비가 많이 들어가는 엄마인척 오만 코스프레는 다하지만, '영양 밸런스'같은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애가 '먹으면' 그걸로 된듯. 작년 하레네 갔을땐 아침으로 전날 먹다 남은 전골 국물에 밥을 비벼서 먹이길래 '개밥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기는 새로 지은 밥과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매일 옆에서 지켜본 게 아니라 뭐라고 참견하기 뭐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본 그 '몇 번의 식사'는 분명히 성장기의 아기에게 정상적이지 않은 식단이었다.


하레아빠는 아들 입원에 또 패닉상태고, '아빠를 닮아 몸에 열이 많아서 찬물 샤워를 좋아하고, 그래서 마무리할때만 따뜻한 물로 헹궜더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앞으로는 혼내서라도 따뜻한 물로 씻겨야겠다.'면서 자책했다.


애초에 아이를 매일 씻기는 것도 '하레아빠'다. 자기는 손하나 까딱 안했으면서 '니가 찬물로 씻겨서 애가 아프다'라고 하레엄마에게 비난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레아빠의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찬물 샤워'가 편도선염의 원인이 되는 건지 '의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전문가로부터 객관적인 의견을 들으면 마음의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을테니.


그리고 환절기엔 어른도 아픈데, 아이가 아플 수도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볼 땐, 아이의 식단, 위생이 더 큰 문제 같은데...


아이가 입원할때마다 즐거운듯(!) 아파서 누워있는 아이의 사진이며 동영상을 찍어서 여기저기 돌리고, 올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하레의 엄마는 역시 정상은 아니다. 아이의 병원 입원을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의 짜릿한 이벤트 정도로 즐기는 것 같았다. 속이 타들어 갔다.




"하레라는 보물이 우리한테 올라고, 니가 진주를 낳을라고 그 모진 고통을 겪었나봐."라고 동생을 위로했다.

심각한 나르시시스트인걸로 보이는,

살면서 만난 '최악의 인간' 중 한 명인 하레엄마가 나에게는 '하레'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갔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알수가 없다,는 오묘한 기분도 들었다.


며칠간 카톡과 전화만 주고 받다가, 드디어 부푼 마음으로 동생을 만나러가는 날.

앞으로 우리 앞엔 꽃길만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만나서 인사를 하자마자 어두운 낮빛의 하레가 엄마가 아닌 낯선사람(지난 번 만남 이후로 몇 달이 흘렀다.)이 차에 타자, "엄마~ 엄마~ "하고 큰 소리로 서럽게 울고, "아빠 여기 있잖아~"하면서 하레아빠는 침울해했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집은 처참했다. 

시신 냉장고도 아닌데, 썩은 음식들로 가득 채워진 양문 냉장고, 창고를 한가득 메운 물건들...

정작 필요한 건 없고, 없어도 될 것들은 너무 많았다.


이게 실내화라니 -_-


하레는 예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았다.

낯을 많이 가리고, 굉장히 냉소적이 됐다.

친해지고 다시 밝아지는데, 두 달쯤 걸리겠지... 예상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그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잘 잡고 있자,고 생각했다.


하레를 내가 돌보고 싶다는 계획을 말했다.

일을 그만두어야 하니, 경제적으로 차질이 좀 생기겠지만, 충분히 감수하겠다고.

매달 꼭 나가야하는 필수비용정도만 해결해주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내가 원해서 온거니까 이것만 지켜준다면 너도 나한테 미안해하지도 말고,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고. 


하레아빠도 그게 자기한테도 베스트라고 하긴 했지만, 3개월 정도는 나에게 돈을 줄 여유가 없다고 했다. 재정상태가 또 파탄인데다, 빨리 이혼하고 싶어서 하레의 적금통장까지 털어서 줬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우리 당분간 밥만 먹고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힘내 보자고 했다.





인간은 분에 넘치는 행복이 눈앞에 있을 때, 갑자기 깊은 병에 걸리고는 해요.
행복을 붙잡는 일은 불행에 안주하는 일보다 용기가 필요해.
영화 <시모츠마 모노가타리>


하레엄마가 나간 후, 하레를 데리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자연사 박물관에 다녀왔다고 했다. 공룡덕후인 하레가 작은 장난감 공룡만 가지고 놀다가 큰 공룡을 보면 아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정작 크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공룡을 본 하레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꼭 감아버렸다고 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무력한 아기인 하레는 도망칠 방법이 없어서 그저 눈을 감고 '아무일도 없다는듯'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지만, 우리는 어른이니까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나를 보호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잊지말자고 이야기했다.


'불행한 결혼생활'과 '이혼'에 길들여진 나머지 겨우 눈앞에 열린 행복의 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눈을 감으면 눈 앞의 공룡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는듯 눈을 꼼 감아버린 하레처럼  눈 앞에 있는 엄연히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문제들을 못본척 하지 말고, 같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해결해 나가자고.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눌때면, 하레는 정색을 하며 싫어했다.

왜그러냐고 묻자, 하도  싸워서 어른들이 말을 하면 싸우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저녁이 되서, 하레와 하레아빠와 산책을 나갔다.

하레가 다니는 어린이집, 놀이터와 마트 등 동네를 둘러봤다.

저녁놀이 예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와! 하레야, 저기 좀 봐. 저기 저 빨간색 공이 뭐지?


하고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모차에 앉은 하레에게 물었다.

하레는 왼손에는 커다란 티라노 사우루스 피규어, 오른손엔 다이노코어 합체 로봇을 들고 앉아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이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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