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대물림과 반복강박
하레네 집에 다녀온 다음날, 같이 갔던 친구가 카톡으로 '맘충의 하루'라는 짧은 웹툰을 보내줬다.
아아, 나도 그냥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어.ㅉㅉ"하고 절레절레하고는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동생과 조카가 바로 그런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흉악범에게 동생과 조카를 인질로 잡힌 그런 기분이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그들을 구출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 어쩌면 아직 말을 못하는 하레가 한 '행동'에 많은 단서가 들어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레가 아빠를 굉장히 좋아하는 반면, 엄마에게는 별다른 애착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 하레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엄마와 있을 때랑 다른 사람과의 있을때의 차이등을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3살밖에 안된 애기가 느리고 무기력하게 무표정으로 커다란 상어 인형을 밴 채, 뒹굴거린다.
혼자서 무표정하게 느릿느릿 놀고, 울면서 보채지도 않는다.
요즘엔 어린이집에서도 매일 누워 지낸다고 한다. 그게 정상인가? 잘 모르겠다.
하레아빠는 "허리가 부러졌는지, 누워 있는 걸 좋아해."하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예전의 하레는 무표정하게 혼자서 놀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심쿵하게 '씩' 웃어주곤 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양 팔을 활짝 벌리고 웃으면서 포옥 안기곤 했다.
지금은 좀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물론 내가 낯설어서 그럴수도 있다.
혹은 내가 하레엄마에게 느끼는 기분을 내멋대로 하레에게 투사한건지도 모를 일이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그저 내가 느낀 '느낌'과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레는 놀다가 중간중간 아빠에게 달려와서 양팔로 아빠의 목을 감싸쥐고 고개를 어깨에 기댄채 폭 안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아빠의 눈을 잠시 그윽하게 들여다보고, 반대쪽 어깨에 몸을 기댄다.
마치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아빠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간다.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자는 척을 하다가, 다시 일어나라고 한다. 이걸 '놀이'라고 반복한다.
단순하게 이불 속에 들어가서 누웠다가, 일어난다.
아빠옆에 따개비같이 붙어다닌다.
반면, 삼촌을 데리러 엄마가 오랜시간 집을 비워도 하레는 엄마를 전혀 찾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왔을때도 딱히 반가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빠에게 그렇게 폭 안겨서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엄마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엄마가 거실 저쪽에 상을 펴고 뭔가를 먹자 달려가서 먹을 것을 조금 얻어먹는 정도.
하레아빠가 집에 없으면 하레가 너무 울어서 하레아빠는 출장이 잦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까지 했다.
거실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내가 머그잔에 물을 담아와서 물을 마시자 하레가 자기도 물을 달라고 했다. 어른용의 큰 컵이라 괜찮은지, 물어보니 괜찮다고 했다.
하레는 물을 조금 마시더니, 평소 느릿느릿하던 행동과는 반대로 단호하게 갑자기 컵의 물을 엄마가 있는 왼쪽으로 바닥에 촤악 하고 쏟았다.
내가 놀라자 하레엄마는 예전엔 고래모양 플라스틱 소변기에 물을 받아와서 거실에 부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저 아이다운 장난인건지, 아니면 나름의 분노표출인건지 알 길이 없다.
개밥도 아니고, 흰 쌀 밥에 끄트머리만 자른 오징어 다리와 밥을 주자 하레는 마치 빨아서 침으로 녹여서 먹기라도 하듯 입에 그냥 물고만 있었다.
앞으로 하레가 말을 할 줄 알게되면, 더 많은 힌트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하레엄마 아이를 적어도 '자기 주장만큼'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나는 하레가 더더욱 걱정이 됐다.
상처받지 않길, 무사히 아이다운 유년기를 보낼 수 있길 바랬다.
피곤에 지친 하레아빠가 잘 길들여져 있는 모습, 그러면서도 하레엄마의 기분을 맞추려고 익살을 떨며 애쓰는 모습을 보면 속상했다.
저런 엄마 밑에서 자라날 하레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면 너무 슬펐다.
둘 다 어엿한 성인이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있다는 점에서는 나보다도 '어른'이다.
아무리 이런 저런 문제가 보이더라도 당사자가 요청한 게 아닌 이상, 참견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옆에서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바라만 보고 있다.
"역시 말을 해야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 그 사이에 하레아빠의 자존감은 점점 닳아빠져가는데!!"라고 가슴에 불이 나다가도, 아니지...지금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누나가 잠깐 봐서 뭘 잘 모르고 있는거야' 라면서 나와 하레엄마 둘 다를 이해하려고 어떻게든 합리화를 해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힘겹게 오갔다.
하레 아빠 입에서 직접 어떤 말이 나오기 전까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때까지 나는 견딜 수 있다. 또다시 뱅글뱅글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라고 과거를 되돌아보고 결국은 '내가 할 수 일 따위는 없었던 그저 착취당하는 인간관계'였다는 사실을 깨닫기위해 하레아빠에게는 슬프지만 충분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이루고 있다고,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믿었던 이상적인 가족, 사랑스런 아내같은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하레아빠를 지지해 주려면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기록해두고(너무 앞서 나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혼 소송, 양육권 분쟁때 유리한 자료가 될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안전요원처럼 너무 위험한 수위까지 가지 않는지만 봐주면 된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될땐 언제든 뛰어들어서 그저 뭍까지만 건져오고 응급처치를 해주는 것이 내 역할의 전부인 것이다.
'뛰어들어서 해결하고 싶은' 내 안의 구원자본능이 은밀하게 눈을 뜨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절대 하레 엄마,아빠의 '드라마'에 나까지 말려들어가선 안된다.
하레아빠의 문제를 '내 문제'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나의 문제와 살아져야 할 나의 인생, 내가 풀어야 할 나의 숙제가 있다.
어쨌든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상황이 심각해진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 스스로 먼저 '건강한 판단 기준'을 갖고, 하레엄마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자,고. 괜히 내 마음만 어수선해져봤자,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레엄마가 하레아빠를 조종해서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하레아빠를 더욱 고립시키는 일까지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언젠가 하레아빠의 정신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나는 꿋꿋이 버티면서 응원하면서 기다릴 것이다,하다가도 하레아빠의 '고립'은 이미 시작된거나 마찬가지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푸대접' 하지만 온갖 미묘한 신호들로 하레엄마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래서 하레네가 우리집에 오는 것도, 내가 하레네 집에 가는 것도 고역이다.
하레아빠와 이야기하려 하면 늘 옆에 하레엄마가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카톡도 감시하겠지.
그래서 우리는 깊은 대화는 나눌 수가 없다.
피상적이다.
공연히 질투하는 시누이가 남동생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것 같아서 내쪽에서도 하레엄마의 이상행동을 섣불리 말하기가 어렵다.
하레아빠에게 함부로 대하는 하레엄마를 뭐라고 혼내기도 애매하다.
지랄발광을 해놓고는 다음 순간 "여보옹"하면서 아양을 떨기 때문이다.
하레아빠에 대한 하레엄마의 멸시도 아주 교묘하다.
지속적으로 넌 내 아래야, 넌 내가 지배한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라는 암시를 준다.
지켜보는 나는 너무 속상해서 꾹꾹 참는것도 지쳐서 도망치듯 나온다.
늘 그 반복이다.
하레아빠가 가끔 '화'를 참는 게 너무 힘들다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분노란 자신의 '경계'가 침해당했다는 경고의 감정이다.
여기가 선이야! 더이상 넘어오지마!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 경계가 모호했고, 수시로 침범당했다.
그런 엄마에게 간신히 빠져나와서는 엄마랑 '똑같은' 여자를 또 만나서 한 집에 살다니.
하레 아빠의 마음 속엔 한평생을 쌓아온 엄청난 양의 억압된 분노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