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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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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14. 2020

3. 갈등과 분란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중구속과 드라마 삼각형

하레네 집에 갈 생각을 하면 동생과 하레를 보는 기쁨보다 하레엄마를 볼 스트레스가 더 커서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그 날이 왔다.

친구에게 부탁해서 같이 가달라고 했다.

친구도 하레를 볼 생각에 같이 가준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고맙고 의지가 됐다.

그 집안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내가 혼자서 온몸으로 받아내지 않아도 되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내내 하레엄마와 있었던 카톡 사건에 대해 이야기 했다.


도착한 집 앞에는 하레의 새(!) 000 유모차, 또 다른 유모차1대, 자전거, 유아용 벤츠까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지난번 끌고 다니던 하늘색 000 유모차는 온데간데 없었다.


새 유모차를 샀으니, 윈터키트까지 받고 싶어서 그 난리를 쳤던 거였다. (결국 윈터키트는 정품으로 하레아빠가 사주었다고 한다. 이혼 후, 이사할 때 이사짐센터 직원분에 의해 현관 앞 소방전에서 유모차가 한 대 '더' 발견됐다. 도대체 '왜' 여기에 유모차를 넣어둔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래야 유모차를 또 살 수 있지!'라고 누군가 해석해 주었다.)


맞은편 집에는 아이의 유모차 1대와 잠자리채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다.

친구에게 소리 없이 눈짓과 손짓으로 "이거 좀 봐!!!"하고 신호를 보냈고, 우리 둘은 마주보고 그저 웃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하레와 함께 낮잠을 자다가 깬듯한 하레아빠가 맞아주었고, 하레엄마는 나오질 않았다.

동생을 데리러 갔다고 했다.

하레엄마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마음이 탁 놓였다.

집이 깨끗하다,고 하니 누나 오기전에 엄청나게 청소를 했다,고 했다.

그래...너네집은 원래 이렇지 않지.


우리는 거실 식탁에 둘러 앉아서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제발 언젠가 하레아빠가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라는 걸 눈치채고 혼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어느 날, 지금 내가 한 말을 떠올리길 바랬다. 우리엄마와 하레엄마의 공통점을 연결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엄마' 이야기를 빙자하여 거의 랩을 하는 수준으로 '엄마는 위험한 사람이다' '왜 위험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레엄마가 오기 전에.


사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이중구속'과 혼돈 속으로 휘말려들게 하는 '드라마 삼각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드라마 삼각형 / 출처-Life Via a line


"잘 기억해둬. 여기에서 우리는 늘 '구원자' 역할을 했던 거야. 우리가 그냥 '참여하지 않으면' 이 드라마는 돌아가지 않아."라고.

제발 동생이 언젠가 이 말을 기억해내고,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곧 하레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들어왔다.

조금 의아했다.

내가 느닷없이 들아딕친 것도 아니고, 같은 날, 하레엄마의 동생이 온 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하레엄마는 하루종일 '너만 누나왔냐, 나도 동생왔다'식의 유치한 행동을 남발했다. 내 동생은 소중하고 니네 누나는 뭐 내 알바 아니야, 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하레아빠에게 집요하게 보냈다. 내가 집에 가고 나서 이 일로 둘이 엄청나게 싸웠다고 했다.


주방에서 못마땅해 하면서 뭔가를 궁시렁거리길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자기 동생에게 "이게 한 송이에 12000원짜린데!"라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설마 그럴리가'라고 했겠지만, 쟤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먹고있던 과일 중 유일하게 샤인머스캣이 냉장고가 아닌 팬트리에 있었는데, 그걸 꺼내다가 먹은 게 매우 못마땅했던 것 같다. 나름 숨겨둔 거였나보다.


갑자기 요리를 막 시작하길래, '벌써 밥을 먹나?' 했는데 닭을 굽더니 우리가 앉아있는 부엌 식탁이 아닌 거실 쪽에 상을 깔고 '자기 동생만' 데려가서 먹였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하레엄마의 행태 관찰'도 있었기에,

그 행동 하나하나를 그저 유심히 관찰했다.


나만 온 것도 아니고, 내 친구도 있는데, 그리고 상식적으로 닭을 굽기 전에 집주인이 손님한테 "우리 좀 출출해서 닭 먹을건데, 같이 드실래요?" 묻거나, 다 구워서 한 입이라도 먹어볼지 권유하는게 상식적이다.

그저 웃기고 재밌었다.


만약 내가 여전히 하레엄마가 타인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여전히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면, 이번에도 엄청나게 혼란스럽고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뛰쳐나와서' 숨을 다급하게 몰아쉬며 몇날 며칠을 도대체 왜 그랬을까...만 생각하며 보냈을 것 같다.


저녁 식사 전이 클라이막스였다.

하레엄마를 관찰하러 온 것치고는 오늘은 너무 무난하고 상태가 좋길래, 조금 실망스러우려고까지 하던 차였다.

저녁을 준비하기 전에 냉장고와 싱크대 문을 부숴가면서 요리를 시작하더니 우리랑 이야기하고 있는 하레아빠를 불러 "여보~ 이거 좀 도와줘."했다. 


높이 있는 뭘 꺼내달라고 그러는건가? 싶어서 보니 바로 아래있는 싱크대칸에서 간장과 양념을 꺼내달라는 거였다. 그리고는 감자를 깎으라고 했다.


낮잠에서 깬 하레는 엄마가 삼촌이랑 집에 와도, 요리를 해도 별 반응도 없이 내내 무기력하게 거실 바닥에 애착 인형을 베고 누워있다. 엄마, 아빠가 요리를 하는 동안 하레를 데리고 놀이방으로 갔다. 

조금씩 다가가 장난을 치자, 하레가 살짝 웃었다.


갑자기 요리를 하던 하레엄마가 놀이방으로 오더니, '과학 영재' 장난감이라면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200만원짜리라고 했다. 조립할 수 있는 방법이 담긴 브로마이드(사고나서 한 번도 펴본적이 없는듯 책의 중간이 붙어 있어서, 표지를 여는데 '쩍'소리가 나기까지했다)까지 들고와서 침을 튀기며 자랑을 하더니 "여보, 하레 자동차 좀 만들어줘."라고 했다.


만에 하나 하레가 과학 영재라고 해도 하레엄마가 그걸 알아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저 한숨과 웃음만 나왔다.

아이의 모든 물품, 유모차, 심지어 장난감조차도 그저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레엄마는 다시 나가서 요리를 하고, 나, 친구, 하레아빠, 하레가 놀이방에서 아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하레엄마가 분노발작을 일으키면서 "아 쫌 이리 와보라고!!! 나 혼자 저녁 준비를 하는데 도와주질 않아!!!"하면서 지랄발광을 했다.


집에 손님이 있는데도 저 정도면, 둘이 있을때는 얼마나 더할까...싶었다.

하레아빠는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절도있고 다급하게 일어나서 하레엄마에게 갔고, 곧 옷을 걸쳐입고는 나가서 햇반을 사왔다.


저녁 준비를 하기 전에 하레엄마가 새 쌀을 뜯어서 쌀통에 넣는 걸 분명히 봤다.

게다가 손님이 와서 요리를 하기 전에 모두가 먹을 충분한 양의 밥이 있나,를 먼저 확인하는건 당연한 일 아닌가.

요리를 못하는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하다못해 정말 밥이 모자랐더라도 조용히 불러서 "여보, 밥이 모자라는데 나가서 햇반 좀 얼른!"이라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게 상식적이다.

저 멀리 부엌에서 놀이방까지 들려오도록 분노발작을 함으로써 하레엄마가 보낸 메시지는 그저 하레아빠를 향한 망신주기, 똥개훈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밥을 먹는 중간에 '밥이 다 됐다'며 모자란 사람은 더 먹으라,고 했다.

애초에 저녁식사를 20분 정도 뒤에 했으면 햇반을 사러갈 이유도 없었던 거다.

우리가 6시에 저녁을 먹기 시작했으니 20분 정도 미룬다고 해도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나, 내 친구, 하레에게는 밥통에 있던 '헌 밥'을 줬다. 이건 미묘하지만 푸대접이다. 사람을 같이 치사하고 쪼잔하게 만든다.


예전 같았으면, 하레엄마의 지랄발광에 너무나 당황하고 불안한 나머지 저녁을 먹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음식에 대한 아부에 가까운 칭찬을 하고, 하레엄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광대처럼 농담을 늘어놓으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썼을 거다.

하지만 그냥 밥을 먹었다.


저녁 메뉴는 닭도리탕, 차돌박이 숙주볶음, 삶은 총알 오징어, 그리고 4종류의 밑반찬이었다.

하레는 흰밥에 총알오징어 다리를 잘라서 '그것만'으로 밥을 먹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견딜 수 있다.'

이 두 가지만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저녁을 먹는 와중에도 하레아빠는 바쁘게 여기저기 잔심부름을 하며 "감자에 양념이 참 잘뱄다."며 음식을 칭찬했다.

하레엄마는 아까의 분노발작은 온데간데 없고 "여보옹~" 하며 섬뜩한 눈빛으로 아양을 떨었다.


밥상에서도 자기 동생에게만 "파김치를 어제 담갔다. 먹어봐라."고 하고 "음료수줄까?"하더니 사이다를 꺼내서 컵과 함께 동생 자리에 딱 놨다.

내가 닭다리를 가져다가 먹자, "닭다리 먹어!"하면서 자기 동생에게 닭다리를 집어다가 얼른 날랐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미묘하고 수동공격적이어서 그저 상황을 묘사하고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스스로도 피해망상 있는 치사하고, 쪼잔한, 시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명백히' 일어난 사실이고, 이제 나는 그 치사한 잔펀치에 넘어가지도 동요되지도 않으려고 애썼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하레의 어린이집 수첩과 사진을 구경했다. 낚시 장난감을 사고 싶었는데 입에 넣을까봐 걱정이 됐다,는 내 말에 "아 있긴한데 싸구려라 물에 못 넣어요. 물놀이 장난감도 사야되는데. 어휴. 있었는데 물때가 끼어서."하면서 또 하레엄마의 은근한 '뭐 사줘.'가 이어졌다.


됐다.

내가 '알아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우리집에서 이만큼 해줬는데, 너네집에서도 그만큼 뽑아내겠다, 어머니는 만나기도 싫으니, 니네 누나한테 받아야겠다'라는 느낌이 든다고, 하레네 집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친구에게 말했는데, 역시 그랬다.


제주도에 다녀오는 길에 면세로 샀다는 홍삼도 선물로 받았다.

내 친구에게도 맥 립스틱을 줬다. (친구가 백일이며, 돌잔치며, 어린이날이며 선물을 여러 번 했다.)

"이런거 안줘도 되는데!"라고 친구가 말하길래 "됐어. 그냥 '고마워. 잘쓸께.'하고 받아. 안줘도 된다고 하면 정말 그런 줄 알아. 나도 이런거 안받아도 되지만, 이제는 해주면 '고마워.'하고 받을거야."라고 속삭였다.


7시가 조금 넘어서 이제 그만 가자,고 친구에게 신호를 보내고, 갈 채비를 했다. 하레아빠는 "안 자고가냐."며 서운해했다.

내가 "가야지. 잘 준비를 하나도 안해왔어. 그래도 가깝네. 당일로 자주 와도 될 것 같아."라고 하자, 하레엄마는 "버스타면 1시간 걸린데요."라며 피쳐링을 했다.

자주 와서 이런 대접을 받으라는건지, 뭔지. 


딱 5시간.

이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이집에서 1박은 무리다.

늘 '뛰쳐나가서' 숨을 고르며 너무 많은 혼란과 생각들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곤 한다.


하레랑 그닥 친해진 느낌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가기 전에 하레가 볼뽀뽀를 해줘서 기뻤다.


하레아빠의 서운해하는 눈빛, 누나랑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눈빛, 표정이 안쓰러웠다.

그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힘내라는 눈빛으로 하레아빠의 왼쪽 어깨를 마음을 다해 쓰다듬어주는 수밖에.


언젠가 될지 모를, 어쩌면 안올 지도 모를 어느 날 하레아빠가 정신을 차렸을때 정서적,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지지해줄 수 있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인생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올라왔다.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하길래 차를 세우고 잠시 구경을 하며 생각했다.


이제 '모든 혼돈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나니, 그저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긴 했지만...여전히 내 동생과 조카가 그 집에 살고 있다.

그 여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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