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반항에 대하여
건강한 반항이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말한다.
건강한 반항은 개인을 성장시키고, 주체성을 신장시킨다.
<독이 되는 부모 Toxic Parents> 수잔 포워드
하레의 앞머리가 눈을 살짝 덮기 시작해서 집에서 간단하게 헤어컷을 해주기로 했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몸에 닿자 하레는 간지러운지 웃으면서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앞머리가 잘못 잘려 나갈까봐 잔뜩 긴장한 하레아빠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채 "하레!! 전에는 가만히 잘 있었잖아!!"하고 소리쳤다.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하레를 무릎에 앉혀서 끌어 안고 "아이, 착해. 하레 잘하네~"하고 응원했다.
간지러운데도 가만히 잘 참아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여웠다.
'전에는 잘하다가 지금은 못하는 게' 아니라 전에는 이렇게 움직이고, 웃고, 간지러워해도 된다는 것조차도 몰랐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기력하게 참고 체념하고, 자기 안에 침잠해 있던 아이를 '얌전하다', '손이 안간다'라고 어른들이 멋대로 착각한 거 아니야?
엄마를 필요로 하지만 엄마가 그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 아이는 엄마를 안전감을 주는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며 때론 위협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피하려 한다. 무섭고 성가신 엄마보다 타인이 덜 무서우며 자신에게 별다른 요구나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아이는 불안하거나 힘들 때 엄마가 아닌 타인에게 위안과 안전감을 얻으려고 할 수 있다. 만일 다른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안전감을 얻지 못했다면 사람보다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물이 자신을 더 편하게 해주고 안정시켜준다고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자동차나 기차, 공룡, 심지어 숫자나 알파벳과 같은 사물이나 무생물에 의지하고 집착하기도 한다.
정서적으로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실망하면서 차라리 감정을 느끼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감정이 없거나 감정을 매우 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불안정-회피적 애착을 보였던 아이는 자라서 감정 표현이 적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기도 한다. 부모의 강한 감정 표현 혹은 무관심에 질리고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엔 유쾌하고 농담도 잘하는 아이도 있다. 얼핏 보면 사교성이 좋아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욕구들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한다. 기대거나 도움을 받는 친밀한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대인 관계도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게 되는 것이다.
<0~5세 애착 육아의 기적> 이보연
엄마의 무관심으로 '공룡'장난감에 의지하고 집착하던 하레.
엄마의 격한 감정표현으로 겉으로 유쾌하고 농담도 잘하지만 자신의 감정, 생각, 욕구에 대해 말하는 친밀한 관계에 서투른 나.
나는 '하레는 엄연히 나와 다른 존재'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나와 하레를 '동일시'하곤 했다.
그래서 하레가 드디어 4살 꼬마아이답게 '말을 안듣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레가 드디어 깨어서 '바깥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자기 나이답게 행동하고 있다!
'반항'도 부모에게 안정감을 느껴고 '내가 반항을 해도 부모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느낄 때만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엄마,아빠에 대한 반항은 언감생심 꿈도 못꿨다.
인연을 끊을 기세로 집을 뛰쳐나오는 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레, 오늘도 고모 말 잘들어야해!"라고 출근 전, 하레에게 하레아빠가 하는 말도 듣기 싫었다.
왜, 아이에게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는거야?
그거 어른이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거 아니야?하고.
이 시기의 하레는 툭하면 '시어 시어(싫어)'를 남발하면서 뭐 하나 한 번에 해주는 게 없었다.
아침에 어린이집 등원준비를 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래도 마취총이라도 맞은듯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시어, 옷 안입을거야, 양말은 '에디'말고 '뽀요요(뽀로로)' 신을거야, 얼굴에 발라준 로션을 베란다 창문에 문질러 얼룩을 잔뜩 만들고는 깔깔거리고 웃는다.
식탁 밑에 기어 들어가서 어린이집에 안갈거라고 버틴다.
놀이터에서는 잘 놀다 말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마치 '나는 자유다!!'하듯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갑자기 드러눕거나 소리를 질러서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며 즐거워헸다.
집에 와서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집안으로 우다다다 들어가서 내가 '안된다!'고 하면 깔깔거리며 신나했다.
스티커북 놀이를 할 때, 스티커가 조금만 삐뚤게 붙여져도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는 씨익 웃으며 장난을 친다.
바깥 세상을 마음껏 탐구하기 시작한 하레가 지나치게 위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면 되도록 무엇이든 다 하게 놔뒀다.
자기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면서 자신의 '힘'을 느꼈으면 했다.
그런데 때론 '관심을 끌려고' 다소 무모한 시도들도 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나를 '안달복달'하게 만들고는 깔깔거리면서 좋아했다.
하레아빠와 나는 이걸 '지지개그'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레의 다소 서툴렀던 상호작용, 하레의 장난끼가 합쳐졌던 것 같다.
작은 장난감을 입에 쏙 집어넣고 빠르게 달려 도망치거나, 손을 씻은 거품이나 더러운 물을 먹는 시늉등을 하면서 나에게서 자꾸만 '강한 반응'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력한 아이들은 보호자인 어른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보다는 차라리 '문제 행동'을 통해서 말썽을 일으켜 체벌을 받는 걸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하레아빠와 함께 아이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자,고 이야기했다.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도 '예쁘다, 사랑해'라고 애정표현을 많이 해주고 잘한 일이나 성취가 있을 때는 꼭 크게 칭찬해주자고 했다.
하레야,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돼.
너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야, 라는 걸 충분히 느낄때까지 계속계속 예뻐해주자고 생각했다.
애정표현을 아끼지 말아야지.
나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서툴고 어색하고,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처음엔 마냥 낯간지러웠지만 노력했다.
'아아, 귀여워.'하고 내 가슴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이 따스함을 그저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 보기로 했다.
위험한 장난을 칠 때도 내가 '강한 반응과 표정'을 보이면 재밌어서 자꾸 하려고 하니까, 관심없다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이때 '고모'로서의 나와 '엄마 역할'로서의 나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어쩌다 만나서 잠깐 놀아주는 고모면 이런 '일탈'을 눈 감아주고 같이 즐겨도 되겠지만, '엄마역할'로서의 나는 아무리 재밌어 하더라도 '하면 안되는 것들에 대한 한계'를 단호하게 그어주어야 하는 거구나.
결국 '엄마'라는 역할은 '재미없고 쿨하지 못하고 고리타분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구나.
그러면서도 되도록이면 '어떤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의 자국'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하고 말이다.
엄마되기, 참 어렵다.
처음에 하레를 돌보기로 결심했을 때, 다른 건 몰라도 '똥 기저귀'가는 것만은 진짜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두 다리를 한 손으로 모아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티슈로 슥슥 엉덩이를 닦아내는 하레아빠를 보면서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제발 큰 일은 어린이집에서 보고 오렴.'하고 조마조마하며 3일째가 되던 날, 드디어(!) 똥기저귀를 갈아야 할 날이 왔다.
하레아빠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기저귀를 뜯어내고 '표정관리'를 해가면서(아이의 똥을 보고 '더럽다'거나 강한 반응을 보이면 안된다고 한다. 또 배변훈련을 '지나치게 일찍' 시작했었던 하레는 똥을 쌀때마다 엄마한테 혼났던 모양인지, 구석으로 자꾸 숨고 피하면서 두려운 표정을 짓곤 했다. 엄마한테 똥쌀때마다 혼이 났었던 건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숨을 참고 최대한 빨리 닦아냈다.
휴, 생각보다 잘했어.
새 기저귀로 갈아 입히고 화장실로 가서 손을 깨끗이 씻고 나왔는데, 엉덩이가 제대로 안 닦인 모양인지 하레가 자꾸만 불편해했다.
다시 기저귀를 열고 물티슈로 닦았더니, 잔변이 계속 묻어 나왔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똥기저귀 갈기도 곧 아무 일도 아니게 됐다.
초봄의 어느 날, 하레랑 같이 한낮의 놀이터에서 실컷 뛰어놀다가 하레가 갑자기 기저귀에 큰 일을 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온통 하레의 땀냄새와 똥냄새로 가득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난 하레'를 보는 게 왜 그렇게 예쁜지.
나,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이게 자기 자식한테 씌이는 '궁극의 콩깍지'구나, 라는 걸 느꼈다.
몇 달이 지나자 밥을 먹다가도 아이 엉덩이를 태연하게 닦아줄 수 있었다.
드디어 기저귀도 떼고 배변훈련도 성공했을 땐, 변기에 싸놓은 똥도 어찌나 예쁘던지.
무슨 똥이 이렇게 귀엽지? 하고 생각했었다.
무릎이 살짝 쓸려서 까졌다가 딱지까지 앉은 상처를 가리키며 "아파"하길래 큼지막한 밴드를 붙여 줬더니, 눈만 마주치면 바지를 걷어올리면서 "아파"라고 하는 하레.
호~해주고, 만져주고, 아프냐고 물어주는 관심을 받는 게 좋은 것 같아서 열심히 호응해 주었다.
이 시간들이 하루 하루 쌓이고 쌓여, 하레도 더이상 주저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듯 엉덩이를 들이밀며 내 무릎위에 앉아 예쁨을 받고 즐길 줄 알고 "고모, 사랑해!"라고 나에게 받은 사랑을 담뿍 되돌려주기도 했다.
두 마리 늑대, 체로키 인디언의 이야기: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다툼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두 마리 ‘늑대’ 사이에서 벌어진단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지, 악한 늑대는 분노, 시기. 질투, 슬픔, 유감, 탐욕, 오만, 죄의식, 열등감, 거짓, 거만함, 우월감, 그릇된 자존심이란다.”
할아버지는 다른 한 마리의 늑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준다.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다. 착한 늑대는 환희, 평화, 사랑, 희망, 평온, 겸손, 친절, 자비심, 공감, 관대함, 진실, 연민, 믿음이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손자의 질문이 당돌하다.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의 대답이 절묘하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크리스토퍼 거머
-1년 후-
아이들은 정말 빠르게 자란다.
오늘은 잘 먹히던 육아전략이 다음날이 되면 전혀 먹히지 않는 일도 허다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담뿍 쏟아 부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던 날이 왔다.
아이고 이렇게 연약하고 예쁜 내 새끼,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내놓나 싶었는데, '여차'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타인을 괴롭히는 아이가 될수도 있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던 일이 있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모두 들어있고,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선과 악을 들쭉 날쭉 골고루 발달시킨다.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지키는 것을 배우는 것, 지켜야할 의무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 부모의 권위를 갖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하레와 함께 우당탕탕 배웠다.
하레는 나에게도 내 안에 있는 두 마리 늑대 중 '어느 쪽'에 먹이를 주고 있는가? 하는 심오한 과제를 던져 주었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강압적으로 억눌러서 '나답게' 살지 못하게 했다면, 반대로 나는 아이를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주어서 '진정 하레답게' 살지 못하게 할 뻔 했구나, 하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