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성격장애
하레아빠가 간밤에 하레가 7번이나 울면서 깨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잤다고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자다가 일어나서 벽을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리기에 무서웠다고 한다.
아기들은 유령이 보인다고 하던데, 정말 집에 뭐가 있는 거 아니야?하면서.
하레 아빠가 출근하고 난 뒤, 하레가 깨서 큰소리로 울길래 침실로 들어가보니 작은 가슴에서 심장이 쿵덕쿵덕 튀어나올 듯 뛰고 있었다.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다.
간밤에도 내내 무서운 꿈을 꿔서 잠을 설친 게 아닐까.
옆에 누워서 토닥이자 다시 잠들 것 같더니, 또 울기 시작해서 계속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고 몸을 어루만지면서 진정시켰다.
바깥으로 나가자고 하길래 애착인형인 상어인형과 함께 샌드위치처럼 안고 나와 거실의 매트위에 아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물을 먹이고 다시 상어인형이랑 꼭 안아줬다.
깨어 있을 땐 불안하면 나나 아빠에게 안길수도 있고 놀면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잠을 자는 동안에는 자기 안의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혼자서 맞대면 해야 해서 잠을 자기 싫어하는 건 아닐까.
이 날은 어린이집에서도 낮잠을 잘 안자려고 했다고 한다.
어쩌면 노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잠을 자는 게 무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하레 아빠에게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기침이나 가래 때문일수도 있고, 무서운 꿈을 꾸는지도 모르지. 그래봤자 안정된건 얼마 안됐고 혼자 자기 속에 갇혀 지낸 게 벌써 몇 달 째잖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요즘도 가끔 성경책에 억지로 밑줄 긋는 척하고, 집회갔는데 찬송가책 안 가져와서 엄마가 노려보는 꿈을 꿔."
라고 말하자 하레아빠가 웃었다.
"하레에게 고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모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듣곤한다.
"아니에요. 제 조카잖아요. 남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시는 분들도 있는데요."라고 대답하며, 지나친 겸손을 떠는 걸로 보일까? 싶기도 했다.
그저 나에게는 가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하레를 돌보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고' 어쩌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매일 육아를 하며 어쩔 줄 몰라서 쩔쩔 매며 울고 웃었다.
하지만 하레를 통해서 내가 인생에서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렸던 조각들을 그러 모을 기회를 얻었다.
하레는 나에게 단순히 조카 이상으로 아주 '각별한 아이'이다.
하레가 태어난지 일주일쯤 된 어느 날, 하레아빠는 엄마,아빠와 절연을 선언했다.
핸드폰 저장명도 '광신도 아줌마(엄마)', '광신도 아저씨(아빠)'로 바꾸었다.
엄마가 하레엄마에게 계속 전도를 하고, 경제적 상황이 안좋은 자기들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그걸 빌미삼아 인생을 쥐락펴락하려는 걸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동생이 '왜' 결혼해서 가정까지 꾸리고도 엄마랑 한 동네에서 사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긴 했다.
나는 어려서는 차라리 고아가 되서 누군가 나를 입양해주길 간절히 바랬고,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엔 '이젠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나를 입양해가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그때부턴 '주민등록증'이 나올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이 집구석을 뜰 날만.
엄마는 내가 8살무렵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을 주장하는 한 종교를 '진리'라 믿고있다.
나는 8살부터 20살까지, 12년동안 이 종교 안에서 자랐다.
어려서야 멋모르고 엄마를 따라 다녔고, 중학생 무렵엔 세뇌가 훌륭하게 진행되어 제법 진지하게 그 종교를 믿고 포교활동도 열심히 했다.
내 마음속에서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어째서 손수 만든 세계를 파괴하고, 자기를 믿는 사람들만 신세계로 데려 간다는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 생겨난 의문은 곰팡이처럼 나를 뒤덮었고, '믿음'이 나약해졌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내가 십대 후반이었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은 Y2K니, 뭐니, 그야말로 '세기말'정서가 가득하던 시대라 '마지막때'라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이때만 해도 단지 그들의 교리에 '공감'할 수 없었을 뿐, 나도 '진리'라고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마치 내가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비참한 최후를 맞는 배신자의 운명을 타고난 건 아닐까? 하고 터무니없는 망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만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정말 엄마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 종교단체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돌아다니던 책 중 한 권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어느 날, 종교생활을 그만두겠다,고 아들이 말하자 엄마는 부엌에 가서 식칼을 꺼내와서 아들 앞에 내려놓는다.
"너랑 나랑 지금 죽자. 니가 지금 죽으면 아직 낙원에 갈 수 있어."
우리 엄마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이때부터 몸만 나가서 성경책에 밑줄을 긋고, 집회와 전도를 하며, 정신은 다른 곳을 떠도는 약한 해리증세가 시작됐다.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마주할 수 없어서 '상상'속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이때의 내가 만든 기억 중엔 '껑충껑충 뛰며 하늘을 날았다'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데, 나중에 심리치료를 하며 정신이 점점 건강해지며 이런 가짜 기억들이 말끔히 사라져서 놀랐던 적이 있다.
어느 날은 2시간 넘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가 뒷자리에 앉은 나와 동생을 돌아보며 아주 들뜬 목소리로 "오늘 들은 설교중에 가장 좋았던 게 뭐야?"라고 물었다.
자기가 감명받은 부분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들은 게 하나도 없이 몸만'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고, 순간 엄마의 기분좋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좁은 차 안에서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는 몸만 가 있으면 안돼, 들어야 한다고, 뭐라도 기억해야해!'하며 나를 다그쳤다.
그 뒤론 예배에 참석해서 엄마가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한 두 구절을 기억해 둔 뒤, 정신을 놓곤 했다.
20살이 되고 주민등록증이 생기자마자, 집을 나왔다.
이제 어디가서 뭘하든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테니까.
이즈음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엄마가 내 일기장을 뒤져서 읽고 내 계획을 알아차렸다.
나를 방 안으로 밀어넣고는 마치 강강술래를 하듯 휘두르며, 마구 후두려팼다.
엄마한테 실컷 맞고 울면서 모든 일기장을 다 찢어서 종량제 봉투에 담아 바깥에 버리고 왔다.
그 뒤로 나는 10년이 넘도록 일기조차 맘 편히 쓰지 못한채 감정을 표현할 통로를 찾지 못해 억압하며 내 안에 고립되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길이 없어 구구절절 써내려갔던 솔직한 기록들이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후로 엄마는 나를 더 철저하게 감시했다.
어느 날은 길을 걷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엄마의 머리가 횟집 입간판 위에 동그마니 솟아올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다시 멀쩡한 척 생활을 하며 호시탐탐 집을 나갈 기회를 노렸다.
박스에 짐을 싸서 가족이 다 잠든 새벽, 편의점에 가서 몰래 짐을 부치고 가방을 싸서 장롱 이불 속에 파묻어 두었다.
아침에 태연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것처럼 집을 나왔다.
아르바이트하던 곳에는 죄송하지만 제가 사정이 생겨서 오늘 그만 둬야될 것 같다고, 당일날 말씀드려서 너무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점심시간, 엄마가 운전학원을 가서 집을 비운 틈을 타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장롱 속에 숨겨둔 짐가방을 들고 동생이 다니던 학교로 가서 인사를 한 뒤, 둘째 이모네집으로 갔다.
이날의 나를 떠올려보면 마치 첩보작전이라도 하듯 하루종일 민첩하게 움직였다.
엄마가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고 있어서 밑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들킬까봐 가슴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둘째 이모는 엄마의 바로 손위 언니다.
자신이 엄마에게 바로 '그 종교'를 소개한 장본인이라는 죄책감에 나를 많이 가여워했다.
너네엄마가 너무 불안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절에도, 교회도 다 데려가봤어. 그런데 왜 하필 거기에 빠졌는지...하며 늘 미안해했다.
내가 집을 나올 수 있게 용기를 주고, 엄마에게 비밀로 하고 나를 돌봐줬던 사람도 둘째이모다.
이 날, 첫째이모도 나를 보러와서 눈물 지으며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내가 집을 나온 바로 그 날, 친척들 사이에 "유주가 남자 때문에 미쳐서 집을 나갔다!"라는 소문이 돌며 한바탕 떠들썩했다.
소문의 진원지는 엄마였다.
둘째이모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가족은 바깥에서 보면 착한 아빠, 살림 잘하는 엄마, 큰 딸, 작은 아들 너무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쇼윈도 패밀리였다.
속은 썩을대로 썩어 문드러진지 오래인데 말이다.
'하나님 아래 믿음으로 뭉친 화목한 가정'이라는 자신의 환상을 박살내고 딸이 집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을 엄마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구구절절 써내려간 일기를 다 읽었으면서도.
결국 작은이모가 나를 데리고 있다는 걸 알게된 엄마는 극도로 분노하며 '당장 쫓아내라!'고 했다.
나가서 고생을 해봐야 집이 소중한 줄 알고 기어 들어올거라고.
둘째이모는 이제 자기도 어쩔 수 없다며 수건, 미니 드라이어, 비누 등 생활용품을 챙겨서 고시원에 데려다주고 우리 유주, 불쌍해서 어쩌냐며 그 날 하루종일 울었다.
하지만 나는 '후련'했다.
집만 아니면 어디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창문도 없던 그 동굴같은 고시원의 제일 싼 방에서 처음으로 '집'이라는 곳의 진정한 의미를 느꼈다.
평생 새장 속에 갇혀있던 새가 처음 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엄청난 자유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자유로움이 몸서리쳐지게 두렵기도 했다.
그 와중에 먹고 살아야 하고 기댈 곳도 없으니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살았다.
집에 돌아가서 '집이 소중했다'라는 걸 증명하는 건 죽는 것보다 더 싫었으니까.
20대 내내 만성 우울증, 무기력증, 조울증, 극도의 불안, 약한 해리증상에 시달렸고,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날도 많았다.
긴장성 근육통, 만성피로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도 늘 밝고 쾌활하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서 내 가까운 친구들조차 내가 이런 상태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지긋지긋하다며 도망쳐 나왔으면서도 집으로 계속 편지며, 이메일을 보내 엄마, 아빠를 설득해 보려고,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애썼다.
이시기에 아빠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면 나에게 '진리에 마음을 열라'고, 사탄의 세상에서 사는 건 안된다고, 기다린다고,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하라고, 문자를 보내라고.
엄마가 하도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 있는것도, 자기가 배가 아프고 살이 빠지는 것도, 동생이 어깨가 축 쳐져 있는것도 '다 내탓'이라고 했다.
'곱게 키워놨더니' 내가 집을 뛰쳐나간게 자기 인생에서 제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라고 했다.
동생이 이번달부터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는데, 지금은 잘하고 있는데 '너처럼 될까봐 두렵다'라고도 했다.
나는 그 후로 무려 10년 동안 정말 '다 내탓이었다'고 굳게 믿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걸 다 만회해보려고 고군분투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동생이 집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혼자 감내하고 누나가 도대체 어딨는지 모른척 했어야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40대에 머리가 하얗게 다 쉬어버린 엄마에 대한 미안함,
아빠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의 가출을 도왔던 이모와 엄마 사이가 틀어진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다 보상하고 싶어서 더 잘하려고 애썼다.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곧 '이 세상의 끝'이 온다더니 내가 30대 중반이 되어가도록 세상은 멀쩡하기만 하다.
이 종교단체는 요즘은 교리를 은근슬쩍 수정해서 활동하고 있다.
가끔 역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번화가 앞에서 가판대를 세워놓고 가만히 서 있는 이들을 보면 나와 동생은 "이야, 요즘은 진짜 편하게 하네. 우리때는 집집마다 다 돌아다니면서 전도했는데."하며 농담을 한다.
이런 유년기를 함께 나눴으니, 나와 동생은 보통의 남매지간에서는 볼 수 없는 '전우애'에 가까운 끈끈함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진짜 가족은 동생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집을 나온지 2년이 흐른 후 엄마,아빠와의 관계도 많이 회복되어 다시 교류를 하고 지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통화를 주고 받으면서.
엄마가 종교얘기를 다시 꺼내길래 내가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말한 뒤로는 나에게는 다시 종교활동을 권하는 일은 없었다.
만나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하며 서로서로 민감한 주제는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너무 피곤했다.
점점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키웠어야 했을 엄마, 아빠의 삶의 고단함,
엄마가 그 종교에 그토록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불우한 어린 시절과 엄마의 인생에 연민을 느꼈다.
참 박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동생은 성인이 되고나서도 꽤 오랫동안 엄마, 아빠와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다른 지역으로 취업을 하고 한 달만에 급작스럽게 결혼을 선언했다.
솔직히 이때는 나도 동생에게 너무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 심하게 들어서 엄마편을 들었다.
동생의 신혼 초에는 동생과 사이가 점점 소원해졌고, 엄마는 나에게 주기적으로 전화해서 하레엄마, 아빠에게 자신이 얼마나 이용당하고 사는지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놨다.
늙은 엄마 등쳐먹고 사는 동생부부가 너무 괘씸했다.
전화를 걸어서 '사지 멀쩡한 젊은애들이 왜 늙은엄마 카드를 쓰고 사냐며'고 한바탕 잔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결혼식날도 대놓고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동생이 느닷없이 엄마, 아빠와 절연을 선언했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엄마랑 동생은 '서로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했다.
동생은 엄마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며 '사채빚도 그렇게 지독하게는 안갚는다'고 주장하고, 엄마는 '지금까지 나에게 가져간 돈이 3천만원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양측에 '통장거래내역을 보내라'고 했다.
객관적인 증거를 제출하라고, 그걸 보고 판단하겠다고.
엄마가 제출한 자료라곤 고작 자기가 수기로 기록한 '장부'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냈던 동생은 급기야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의 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밤이 새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토록 오랜시간 엄마가 달랑 두 명있는 자신의 아들 딸을 이간질하며 갈라놓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나랑 그렇게 오랜 세월 지지고 볶고 하면서 '다시는 종교이야기를 안꺼내겠다'라고 단단히 약속해놓고 그걸 동생과 심지어 남의 집 딸인 하레엄마에게까지 그대로 반복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이때 아주 오랫동안 블랙코미디라고만 생각했던 내 인생의 장르가 순식간에 '일일 막장 드라마'로 변했다.
'악마의 편집'이 된 엄마 버전의 이야기에 오랜 기간 세뇌되어 있다가 맞은 대반전의 스토리였다.
"이게 다 그놈의 종교때문이야!!!"
처음에는 우리 가족을 파괴한 그 종교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서 엄마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 문제의 뿌리를 깊게 파고 들어가다가보니, 엄마에 대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그 종교에 그토록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좀 더 본질적인 문제.
A에겐 B욕, B에겐 A욕하며 이간질 시키고 항상 관심의 중심에 서기.
고귀한 봉사정신으로 가장해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을 돌보며 우월감 느끼기.
그 불쌍한 사람이 더이상 자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상황이 나아지면 배신감에 분노하기.
버려질까봐 두려워하기.
관심을 끌기 위해 주변인에게 자살암시하기.
이랬다 저랬다 손바닥 뒤집듯 행동하며 사람 미치게 만들기.
기분이 날아갈듯하다가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나는 엄마가 경계선 성격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를 앓고 있다고 99% 확신한다.
1%가 부족한 이유는 엄마가 전문가 진단을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봤자 엄마의 악마의 편집과 이간질로 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늘 호로자식으로 둔갑하고 마니까 상담과 치료를 권하는 장문의 편지와(엄마가 또 내 욕을 하기 시작했을 때, "무슨 일인데? 편지 가져와봐."하고 누군가 함께 읽고 "이거 니 얘기 맞는데?"라고 해주길 바랬다.) 엄마의 상태를 잘 설명한 2권의 책을 함께 보냈다.
엄마가 자신의 아픈 마음을 돌보고 치료하는 동안 우리가 이렇게 '엉겨붙어' 있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조금 시간을 갖고 각자의 상처를 잘 치료하자고 했다.
엄마는 '사람을 한순간에 미친년을 만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치료받기 보다 나와의 관계를 끊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렸다.
드디어 '그놈의 가족'에게서 놓여났다는 후련함과 버림받았다는 쓸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리고 엄마의 병, 엄마의 병이 나에게 준 영향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치 '내 전생애를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 긴긴 세월을 쓸데없이 괴로워하면서 살 수 있었던거지?? 하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갓 태어나 목을 가누고, 뒤집고, 바닥을 기고, 이유식을 시작하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하레를 보면서 나도 '하레랑 동갑'이다, 지금부터 나도 하레랑 같이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새로 배워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를 쓰고 걸음마를 연습하는 하레를 보면서 '성장'이란 절대로 '그냥'되는 건 아니구나 싶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바로 이 시절, 엄마말만 믿고 내가 하레엄마에게 했던 모진 행동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호구짓을 많이 했다.
하레엄마도 정말 희한한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엄마가 혼자서 판을 돌리며 조종하던 폐쇄된 우리가족 안으로 어느날 와장창 깨고 굴러 들어왔다. 두 여자가 서로 기싸움을 하며 판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중간에서 정신없이 놀아나던 나와 동생은 차례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레를 남기고 떠났다.
어쩌면 하레엄마는 나에게 '은인'이다.
지금 하레아빠는 다시 엄마,아빠와 교류를 하고 지낸다.
마치 하레가 자기 엄마를 '장난감 사주는 사람'취급하는 것처럼, 동생도 엄마에게 애정보다는 보상심리같은 걸 가진 것 같다.
엄마는 한동안 "너 때문에 누나랑 사이가 틀어졌다"며 동생을 비난했다고 한다.
다시 동생과 연락이 닿자 요즘엔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나에게도 연락을 슬금슬금 시도한다.
무려 20년이 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려주었는데, 여전히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엄마랑 연락을 하고 지내기로 선택한다면 나는 또 엄마의 이간질과 심리조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엄마와 나, 둘 중에 하나만 택할 수 있었다.
나는 '나'를 택하기로 했다.
나는 '엄마로부터 나를 보호'하기로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엄마가 최소한 '치료를 염두해두고 상담'을 받기 전까진 다시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하레와 나는 그렇게 올해 만 4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