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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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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26. 2020

11. 이혼 후, 첫 면접교섭

애증의 엄마

얼굴에 살이 올라 귀여운 빨간 사과볼을 하고는 통통거리며 즐겁게 뛰어다니던 하레에게 다시 '슬픈 빛'이 돌아왔다. 

이제 얼굴의 광대뼈에 개구짐이 늘 어려있다고,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슬픈빛이 다시 돌아와 하레를 채우고 있는 걸 보니 저 어린 아이가 얼마나 복잡하고 이해하지 못할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있을까 싶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레엄마가 집을 나간 지 두 달째 되는 어느 주말이었다.

하레를 보러 오러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고 했다.

별로 내키진 않었지만 아이의 '친엄마'다.

그 둘을 못만나게 할 권리가 내겐 없다.

주말 동안 나는 집에 가 있기로 했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온다기보다는 아직 자기 부모에게 이혼했다고 말도 못했고, 애 핑계대서 돈을 뜯어내야 하는데 지난 설날에도 '가족여행을 가야해서 못간다'고 거짓말을 했으니(이때 이미 별거중이었다), 행복한 가족 주말 나들이 코스프레를 해서 사진 촬영을 할 요량으로 온 듯했다.

하레를 보러 오는 차비는 투자금/씨드머니고.


그래도 친엄마라고, 또 오랜만에 와서 자기 잘 놀아주니까 하레는 주말 내내 텐션이 엄청 좋았다고 한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하레엄마가 돌아가고 난 날 저녁, 나도 하레네 집에 도착했다.

하레엄마를 데려다주러 간 모양인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겨우 주말동안 집을 비웠는데, 또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하레엄마 특유의 '머리 냄새'같은 게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집 안을 정리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레야, 어디 갔다왔어? 보고싶었어. 고모가 기다렸어."라고 웃으면서 말을 걸자, 하레는 매우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레는 또 그 슬픔이 그득한 아이로 변해  있었다.

겁이 났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현관에서 주춤하며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엄마는 왜 또 가버리는 거지?

며칠동안 고모는 어디에 갔다가 갑자기 나타난거야??

마음을 줬는데 다들 또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야?

왜 자꾸 다들 없어져 버리는거야? 라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이 작은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최선을 다해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하레의 점퍼를 벗겨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하레는 그제서야 나에게 무너져내리듯 푹 안겼다.


한참을 내 품에 안겨있던 하레는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빨래집게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 하레는 불안하고, 화가 나고, 두렵구나.

계속 안아주고, 웃으면서 말을 걸어주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레엄마는 "내가 열심히하면 같이 다시 살 생각은 없냐."고 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이번에 와서 '하룻밤 자고간다'는 이야기에 어린이집 엄마들은 물론 내 친구들도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혼 안하는 거 아니냐고.' 

나도 불안했다. 

다시 동생과 조카를 흉악범에게 인질로 잡힌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하레아빠는 "나는 너랑 살기 싫은 이유를 100개는 댈 수 있는데, 너는 내가 너랑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몇 개나 댈 수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다시 같이 살고 싶다, 변하고 싶다고 하면 그럴 거 같다는 뭔가 결과물을 가지고 와야지, 예전이랑 똑같이 오자마자 옷은 여기저기 던져놓고, 더럽기는 여전했다고 한다. 도대체 뭘 바라는거냐고.

하레아빠가 그런 단단한 마음이라면 다행이긴 하지만, 하레엄마가 나가서 일하기는 싫고, 돈은 있어야 하고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려고 꼼수를 부리는 걸 보니 너무 짜증이 났다.


하레엄마는 두 달 만에 자기 아이를 보러 오는데 과자 한 봉지 안사들고 '빈 손'으로 왔다.

주말동안 아이 밥은 잘 먹였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가기전에 내가 사다놓은 재료들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 자기 얼굴은 레이저 시술을 하고, 머리를 연장해서 긴 생머리를 하고 왔다고 했다.

(이혼 후, 하레의 첫 생일날도 구찌 클러치에 발렌시아가 티셔츠를 입고 왼쪽 팔목에 왠 남자이름을 타투로 새기고는 '돈이 없다'며 빈 손으로 왔다. 그 날도 하레아빠에게 또 '다시 잘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아직도 일을 하는 것 같진 않고 이혼했다고 집에 말을 못해서 아는 언니집에 얹혀 살고 있다고 했다.

하레아빠에게 "걔는 핵폐기물이야. 재활용 쓰레기가 아니라고. 고쳐서 쓸 생각하지마! 잠깐은 변한듯 보여도 막상 돌아오면 똑같을 거야."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렇게 말하는 나 스스로도 여전히 핵폐기물급의 인간에 대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느낌이다. 

하레엄마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것 같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데, 아무리 지랄맞아도 친엄마인것을.

서른 중반이 된 나도 엄마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좌절하면서도 기를 쓰곤 했다.

하물며 이 작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혼이 뭔지, 엄마는 어딜 가는건지, 왜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건지...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엄마 아빠가 늘 싸우는 걸 보면서 늘 조마조마함을 느꼈을텐데, 이번에도 엄마품에 안겨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둘이 만났으니 언제 또 싸움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자극된듯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온 엄마가 잠깐이나마 즐겁게 놀아주니 좋기도 하고, 그 격렬한 좋음과 긴장과 불안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라졌던 고모는 다시 돌아오고.

지금 하레는 무척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2주 정도 지난 어느 날,  하레엄마가 또 와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친엄마니까 못만나게는 못하는데, 이렇게 자주 오는 건 특히나 지금 겨우 안정 찾은 애한테 오는건 '반대'라고 했다.

하레에 대한 애정이 없었더라면, "아니, 그렇게 예쁘면 데려가서 키우지 왜?"라고 신랄하게 빈정거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이를 무슨 장난감처럼 지 기분 내키는대로 들쑥날쑥 미친듯이 예뻐하다가 방치하다가 극단의 롤러코스터를 태우는데, 아무리 친엄마라도 하레를 그런 자극에 되도록이면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애를 또 와서 들쑤셔 놓고, 흔들어놓고, 헷갈리게 하고.


하레의 행동, 투정에 이제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한계를 정해주고, 안되는건 안된다고 가르칠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무너져 있는 걸 보니 안되는 일인데도 안된다고 못하고 다 들어주게 됐다.

아이는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안된다'라는 말에도 서럽게 울어댔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나도 그런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서 쩔쩔 맸다.

그렇게 울면 자기 말을 다 들어준다는 걸 눈치채더니, 서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만 높이면서 우는 시늉을 하는때도 잦아졌다.


하레가 엄마를 왜 못 만나는지,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될 수 있으면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앞으로 꼭 봐야 한다면 바깥에서 잠깐 몇 시간 만나고 집에는 안오는 걸로 해라.

집에 와서 같이 자고 놀고 가면 아이는 또 헷갈린다.

이제 같이 사나? 했는데 또 가버리면 더 빈자리가 크다.

아직 왜 엄마가 또 가는지도 모르는데.


바깥에서 보고 집에 못오게 하고 현관 비밀번호도 바꿔라.

그리고 아침에 일찍 와서 저녁에 가고, 갈때도 택시를 타고 가든 말든 태워다 주지 말라고 했다.

도대체 왜 집에 와서 자고 가는거냐고.

사람들이 아무도 이해 못하고, 나도 이해 못하겠다,라고.


하레아빠도 하레가 엄마가 떠날때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걸 오랜만에 봤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가 우는데도 떼어놓고 가는 엄마나...

그런 것도 엄마라고 떨어지는 걸 슬퍼하는 아이나...


하레아빠는 조정기간이 완전 끝나고 완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까진 언제 갑자기 변덕을 부려서 도장 안찍는다고 버틸까봐 지금 될 수 있는대로 봐주는거지 지나면 얄짤 없을거라고 한다.

도대체 조정기간이 왜 이렇게 길고 안 가는건지 모르겠다고.

그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결국 하레아빠는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 둘이 다소 격앙된 상태로 이야기를 하자,  하레는 싸우는 줄 알았는지 심각한 표정이 됐다.

하레아빠는 "싸우는 거 아니야!"라고 했고, 나는 "아빠가 아주 좋은 결정을 해서 아이 착해. 잘했어요. 아빠 최고에요! 해준거야." 하며 하레아빠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주자 안심하는 듯했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하레의 상태가 또 안좋아지자 육아와 보육의 베테랑이신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도 당혹스러운 듯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할 지 난처하신지, "음...저...하레엄마가 조금...에..."하며, 설명할 말을 한참 힘겹게 찾으셨다.

얼른 알아차리고 하레아빠와 나눈 대화의 결론을 말씀드리자, 원장 선생님도 "정말 잘 생각하셨다."고 말하며 한시름 놓으시는 듯했다.


지금 내가 하레의 감정에 일일이 흔들리면서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레는 흔들리고 슬프고 가라앉았다가도 이런 감정들은 지나가는 거라는 걸 스스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에서 늘 든든하고, 안전하게, 하레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기지가 되어 '늘 같은 상태'로 하레를 기다려야 한다,고.

내가 같이 슬퍼하고 마음 애잔해져 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엄마, 아빠의 이혼은 벌어진 일이고, 되돌려져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레는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가야 한다.


방황하던 하레가 '나'의 기분에 안정을 되찾도록 해야지, 흔들리는 아이의 기분에 나까지 덩달아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를 먼저 돌봐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아이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인생을 좌지우지할 거라는 생각 자체도 오만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최선을 다하되 몰라서 저지르는 실수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내가 가진 이성과 오감, 직감을 최대한 동원하는 수밖에.

어차피 나는 내 인생 외에는 그 누구의 인생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내가 하레의 엄마도 아니고,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 위해서 왔지만 결국 진짜 엄마라던가, 하레만의 내적존재를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해봤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어.

일단 내 기분부터 관리하고 하레가 언제든 편안하게 돌아오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라는 기분을 주는 사람이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필요할 때 언제든 와서 내게서 위안을 얻고, 다시 자기 인생을 살러 떠날 것이다.





-1년 후-

여전히 하레엄마는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들쑥날쑥 '면접교섭권'을 행사한다.

어떤 때는 한 달에 2번, 어떤 때는 3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기도 하다.

이제 하레는 엄마를 '장난감 사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듯하다.

엄마한테 '혼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와도 씩씩하다.

하레엄마도 오랜만에 만나니 아이가 예쁜건지, 아니면 자기 기분 풀려고 그러는지 비싼 장난감을 한아름씩 사서 보내기도 한다.


한 번은 엄마의 눈빛과 행동을 그대로 배워와서 따라하길래 훈육을 해야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써보려고 한다.


올해 5살이 된 하레는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입학했다.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5월 유치원 등원 첫 날, 오랜 가정보육 후 유치원이라는 낯선 세계로 '홀로' 들어가야 하는 또래 친구들은 엄마한테 안겨서 안들어가겠다고 울고 있었다.

엄마들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우는 아이를 어찌할 줄 몰라하며 유치원 현관은 눈물바다였다.


혼자서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낯선 유치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하레를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헤어짐을 경험하고 극복해서 반나절 유치원 가는 것쯤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구나, 너는.

앞으로 살아가며 생길 많은 만남과 헤어짐들도 그렇게 꿋꿋하고 씩씩하게 이겨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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