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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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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Sep 29. 2020

14. '나는 티라노사우루스다'를 읽고

유년기에 대한 애도

아침에 하레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하레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언어적 자극을 줘서 어휘를 늘려줄 수 있는 작품,

지금 하레의 수준보다 '살짝'만 높아서 한 번에 듣고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반복해서 듣고, 설명해주면 이해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

그림을 보며 직관적으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

좋은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작품을 읽어주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를 읽어주었더니, "나는 너무 못생겼어."하며 따돌림을 당하는 장면에서 하레가 너무 슬퍼했다.

그래서 이 날은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이 나오는 현대적인 작품들 위주로 골라보자,고 생각했다.

도서관 컴퓨터에 '공룡'으로 검색해보니, 미야니시 타츠야의 <나는 티라노사우루스다>라는 책이 나왔다.

서가에 가서 대충 훑어보니, 그림체도 개성있고 글도 많지 않아서 아이가 집중해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판다곰이 나오는<판다 목욕탕>, 거북이가 나오는 <껍질이 싫어>, 늑대와 양이 나오는 <그거 참 신기한 일도 다있네> 이렇게 4권을 빌렸다.


하원한 하레랑 집에 도착해서 내일치 어린이집 가방을 준비해서 "가방을 제자리에 놓고 오면 '공룡책' 읽어줄거야."라고 하자, 얼른 갖다 놓고 와서 "공룡책 어딨어요?"라고 물었다.

하레를 무릎에 앉히고 같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기 프테라노돈은 자상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아빠는 아이에게 먹이를 구해다가 열심히 먹이고 '바람을 타고 나는 법'과 무서운 티라노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을 가르친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으로 품어주며, '남을 돕고 사는 법'을 가르친다.


어느 날, 아기 프테라노돈이 '아빠만큼' 자라나자, 부모는 이제 아이가 독립할 때라고 결정했다.

아이가 잠든 어느 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엄마,아빠는 아이 곁을 떠난다.

아침에 일어난 프테라노돈은 엄마, 아빠를 애타게 찾지만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자 울다 지쳐 잠이 든다.

그때 산 위에 잠들어 있는 프테라노돈을 잡아 먹으려고 티라노사우루스가 저 멀리서 쿵쿵 다가온다.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나면서 산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티라노사우루스가 그 밑에 깔려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만다.

전신에 상처는 물론, 눈도 안보이게 된다.

프테라노돈은 그 티라노사우루스가 아빠가 말한 '무섭고 사나운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걸 알고 처음엔 도망가려고 한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대가 나타나면 도와야 한다'라는 엄마의 말을 기억해내고 티라노사우루스를 돕기로 결심한다.


티라노 사우루스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을 치우고,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티라노의 몸을 나뭇잎으로 덮어 추위와 비를 막아준다.

아직 먼 바다까지 갈만큼 잘 날지는 못해서 물고기는 못잡지만, 아빠가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빨간열매'를 모아다가 티라노에게 먹인다.

티라노가 '무서운' 목소리로 "넌 누구냐!!"라고 물어도 쫄지 않고, 아니 사실 살짝 쫄았지만 얼른 정신을 차린다.

티라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용기를 내서 큰 목소리로 "나는 티라노 사우루스다!!"라고 재치있게 대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티라노에게 먹일 열매를 가져오던 프테라노돈은 티라노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있는 걸 발견한다.

어쩌면 눈이 다시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자기가 티라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낀다.

그때 아빠가 말한 '바람을 타고 높이 높이 나는 법'을 기억해내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티라노에게 마음속으로 인사한다.

"내가 티라노였으면 우리는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됐을지도 몰라. 하지만 니가 건강해져서 정말 다행이야." 하고 티라노의 안녕을 따뜻한 마음으로 빌며 떠난다.


그런데 사실 티라노는 프테라노돈이 '티라노 사우루스'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프테라노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 '같이 먹으려고' 물고기를 잡아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정말 고마워. 너랑 같이 먹고 싶었어."하면서 티라노가 눈물을 흘리는 부분을 읽어 주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눈물이 나오려는 걸 다시 밀어넣었다.

하레랑 즐겁게 잘 놀다가 말고 동화책을 읽다가 왠 눈물이람.

어휴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했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날 하루를 마치고 자기 전에는 <껍질이 싫어>를 읽어주었는데, 하레가 공룡책을 '한번 더' 읽어달라고 했다.

다시 <나는 티라노사우루스다>를 읽어 주었다.

이번에는 '도대체 아까 왜 눈물이 났을까'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유를 생각해가며 읽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 콧물이 마구 쏟아져서 책을 읽어주다 말고 잠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가며 울었다.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티라노의 "너랑 같이 물고기가 먹고 싶었어."하는 대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니까 하레도 같이 동요해서는 "아빠, 두뚜띠떠여. 아빠~(아빠, 보고 싶어요)"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야기를 '100% 제대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림 속에서 티라노가 울고 있는데다가, 고모도 책을 읽다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 시작하니까 자기도 왠지 슬픈데, 그 이유가 '아빠가 보고싶어서'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날은 아빠가 야근을 해서 늦게 온 날이었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하레는 왜 울어? 아빠는 일하러 갔지. 하레가 코~자고 있으면 올거야."하고는 하레볼에 뽀뽀를 하고 조명 리모컨을 주고 불을 끄라고 했다.

하레가 불을 끄자, "문어가 와서 먹물 뿌! 했나봐. 아잇 깜깜해!!"하고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빨리 전환시켰다.

어둠속에 누워 하레가 물어보는 말들에 대답해주면서, 나는 '이토록 멋지게 자라난 프테라노돈'에 대한 감동과 여운 때문에 계속 소리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어린시절에 경험한 인간적 상호 작용의 유형을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과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내적투사introjection, 내면화internalization, 동일시identification이라는 세 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합니다.

첫째, '내적투사'란 어린 시절 부모가 내게 한 그대로 내가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전에 부모가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현재 내가 나를 바라보고 대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존중받았으면 나도 나를 존중하고, 과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보아주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 역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둘째, '내면화'란 부모가 여전히 도처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모의 행동을 내면화함으로써 현재 성인인 나의 인간관계에서도 마치 부모가 계속 내 옆에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비록 부모는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내게 작용합니다. 내가 어떠해야 하거나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부모의 모든 지시나 금지를 지금은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즉 성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이처럼 행동합니다.

셋째, '동일시'란 어린 시절 부모가 내게 한 그대로 지금은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태도와 행동방식을 동일시함으로써 얘전에 부모가 나를 대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합니다. 내가 존중받았으면 나도 상대를 존중하고, 부모가 나를 보아주지 않고 내게 공감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고 그들에게 공감하지도 않습니다.


역기능적 인간관계 유형은 '내적 투사, 내면화, 동일시'라는 세 가지 메커니즘의 작용으로 그것이 당사자에게 고통스럽더라도 계속 반복됩니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약한 애착 상태에서 인간관계를 맺기 때문에 파트너에게 지나치게 큰 갈망과 보상을 바라게 됩니다. 아니면 불안정한 애착은 아예 관계에 대한 원칙적인 거부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유한 내적 작업 모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해 관계의 상호 작용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책임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에게만 온통 책임을 돌리며 불평과 비난을 쏟아놓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으려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상처없이 사랑하고 싶다> p.193 - 배르벨 바르데츠키




프테라노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말한 '내적투사, 내면화, 동일시'가 생각났다.

사랑하는 아이를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우는 엄마, 아빠의 마음. 

그렇게 애를 쓰고도 아이의 건강한 독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을 엄마,아빠 프테라노돈의 심정. 


엄마,아빠와 잘 형성된 강한 애착으로 자신과 타인을 신뢰하는 능력을 키운 프테라노돈은 혼자 남아 슬프지만 엄마, 아빠로부터 배운 내적자원(내면에서 울리는 엄마의 가르침과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돌봐준 엄마의 따스함을 기억해낸다)을 훌륭하게 사용한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적'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도움을 베풀 줄 아는 훌륭한 인성, 아니 용성을 가진 마음이 따뜻한 프테라노돈으로 자란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따뜻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명확한 자신만의 '경계'가 있어서 정성껏 돌보던 티라노가 회복하자, '자신과 티라노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소망(친구가 되고싶다)'과 명확히 구분하고 '떠날 줄'도 아는 판단력과 단호함도 지녔다.


그 커다랗고 무서운 티라노가 눈 앞에서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아빠의 '바람을 타고 높이 날라'는 가르침을 기억해낸다.

자신의 날개와 능력을 믿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지금까지는 '먼 바다'에 갈 수 있는 힘이 없었지만, 티라노에게 줄 '빨간열매'를 모으며 매일 쌓아온 역량이 '위기'를 맞아 크게 빛나는 상황이다.

비록 티라노보다 작고 연약해서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해서 위기에서 벗어나 자기자신을 구한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안녕을 기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여유도 지녔다.


아, 정말 '멋진 프테라노돈'으로 잘 자랐구나,하는 대견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또 '한 입 거리' 먹이같은 존재일 수도 있었던 프테라노돈에게 애착과 감사를 느꼈던 티라노의 마음. 

같이 먹으려고 기껏 물고기를 잡아 왔는데, 날아가버린 프테라노돈에 대한 아쉬움, 하지만 그런 '오해'가 생겨도 어쩔 수 없음을 아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온데 합쳐져서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나는 하레가 '프테라노돈'같은 사람으로 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프테라노돈의 엄마, 아빠처럼 하레에게 훌륭한 내적 자원을 줄 수 있어야 할텐데...

아니, 나는 하레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프테라노돈'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구나, 라고 깨달았다.




그 날, 이런 꿈을 꾸었다.


갑자기 '띠띠띠띠'하고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한 가족(엄마, 아빠, 7세, 9세 정도 되어보이는 딸-이렇게 4인가족이었다)을 데리고 엄마 특유의 늘 화난것같은 표정과 날쌘 걸음걸이로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꿈속에서 장면은 하레네 집이므로 엄마는 연락도 없이 '침입'한 것이다.)

나는 '빨리 하레아빠에게 연락을 해야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자리에 몸이 마비된 듯 얼어붙어 피하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들어오는 엄마와 마주쳤다.


나는 현관 앞의 행거에 걸려있던 플라스틱 옷걸이를 얼른 빼서 엄마에게 겨누며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했다.

엄마는 같이 온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가 너한테 손을 대다니 말도 안돼'하는 듯한 표정으로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언제든 달려들어 나를 잡아 뜯을 수도 있다는 호전적인 분위기를 나는 감지할 수 있다.

"너, 여기(하레네 집) 왔다갔다하고 있었다며??"하고 엄마가 따지듯 묻는다


엄마가 한 차례 나를 때리려고 했지만 빠르게 피했다.

엄마는 같이 온 사람들의 시선을 매우 의식하며 이미지 관리를 한다.

이 가족의 두 딸은 마냥 천진난만하다.

언니와 동생 조금은 지루한듯 서로 장난을 치고 있다.

나는 이 '가족'이 없었더라면 엄마가 나에게 했을 일에 대비하며 완전히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기억나는 다음 장면은 내가 하레를 양팔로 꼭 끌어안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거리를 헤매는 장면이다.

하레는 내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올린채 세상 모르고 곤히 자고있다.

(당시 하레는 한차례 몸무게가 늘고 키가 크면서 웬만해선 안고 다니지 않을 때였다. 꿈속에서도 하레를 이렇게 오래 안고 거리를 걷는다는 건 이례적이다,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엄마는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사고를 가장해서 죽이려고 한다.

사람들이 왜 우냐고 묻기에, '엄마가 우리를 차로 치어서 죽이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엄마가 자기 아이를 죽이다니 말도 안된다'라고 했고, 나는 최대한 그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를 쓴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이상한 여자라는듯 쳐다본다.


엄마가 결국 하레를 차로 치어 죽이고 나서야 내 이야기가 사실로 '증명'될까봐 너무 두렵고 슬프다.

꿈속에서 그렇게 하레를 꼭 끌어안고 엉엉 울며 거리를 헤매다가 깨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하레는 내 손에 자기 얼굴을 묻고 상어인형을 베고 베개에 발을 올린채 거꾸로 누워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하레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눈물이 급기야 터져나오고 말았을때, 나는 '왜' 눈물을 빨리 닦고, 분위기를 다시 '띄우고' 아무렇지 않은듯 행동했을까.

그 모든일이 아주 순식간에 '자동'으로 일어났다.

그냥 솔직한 태도로 눈물을 보이고, "티라노가 같이 물고기를 먹으려고 잡아왔는데, 프테라노돈이 날아가 버렸어. 티라노가 울고 있네. 고모도 슬퍼."하고 하레와 당시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감정'을 억압하거나, 주지화시켜서 방어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그대로 느끼고, 때와 장소에 맞게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힘든 과제다.

그렇게 현실에서 마음껏 울지 못한 내가 꿈 속에서 엉엉 울며 거리를 헤맨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태도가 자칫 하레에게 '슬픔은 나쁜거야. 눈물을 보여선 안돼. 웃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다음부터는 책을 읽다가 재미있으면 깔깔깔 함께 웃는 것처럼, 눈물이 나면 자연스럽게 울면서 슬퍼해야지 다짐했다.

기쁨/재밌음이 지나가면 심심해/지루해가 오듯 슬픔도 자연스럽게 지나간다는 걸 알려줘야지,하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내가 하레를 '엄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토록 절박한 슬픔을 느꼈다면, 내가 보호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유년기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커다란 슬픔과 무력감, 좌절을 느꼈을 거라고.

그러니까 Self-pity가 아닌 Self-compassion으로서의 '자기연민'을 갖고 자꾸 '괜찮아지려고만' 하지 말고, 나 자신의 잃어버린 유년기에 대해 애도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땐 좀 더 자연스럽게 슬퍼하자,고 생각했다.

슬픔이 찾아오면 찾아오는 만큼 말이다.

늘 괜찮을 필요는 없다.

매일 아침 '웃으면서' 일어나는 사람같은 건 없다.

괜찮아 지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는 있지만, 정말 괜찮아지는 건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고통은 슬픔을 느끼면서 약화된다. 크게 울지는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조용히 견디고 있다. 무언가가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다면, 대부분 그 원인은 상실로 인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거부로 인한 상실은 큰 슬픔이 된다. 당신의 실수, 환경의 조건, 다른 사람의 무시 등으로 기회나 보상의 기회를 잃을 때도 마찬가지다. 슬픔은 짧은 감정이 아니다. 적어도 몇 분에서 몇 시간, 심지어는 며칠 동안 슬픔에 잠긴다.
<언마스크> p.193 - 폴 에크먼外


슬픔의 주요 원인은 '상실'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는 잃어버린 유년기겠지.


'슬픔'이 가장 자주 섞이는 감정은 화와 두려움이라고도 했다.

괴로움과 슬픔을 감추기 위해 과장되어 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슬픔을 느끼며 '내려놓기'보다 분노를 통해 내 인생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힘의 감각'을 느끼고 싶은걸까?

이 감정은 여전히 소화중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렇게 슬픔을 '느낄 수 있고, 느껴도 된다'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고통이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슬픔이 한 번 풀려나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슬픔을 꾹꾹 참으면서 자신을 마비시켜 버리니까 말이다.

이제 '놓아줘도 돼. 느껴도 돼.'라고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나에게는 굉장한 발전일지도 모른다.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건 외로운 경험이다. 이런 부모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보인다. 평범하게 행동하면서 자녀의 신체적 건강을 돌보고 식사와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자녀와 확실한 정서적 유대를 맺지 않으므로 자녀가 진정으로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봐주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은 몸에 입은 상처만큼이나 근본적인 고통을 안겨주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서적 외로움은 막연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보여주거나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분은 그걸 '공허함' 또는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감정을 실존적 고독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실존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건 가족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정서적 친밀감이 부족해도 그걸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아직 이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가 정서적으로 미숙하다는 걸 이해할 가능성은 더 낮다. 그저 본능적인 공허함만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아이들이 외로움을 겪는 방식이다. 성숙한 부모를 둔 아이는 부모에게 가서 애정 어린 관계를 확인하기만 해도 외로움이 해소된다. 하지만 부모가 깊은 감정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면, 아이는 위로를 원하는 걸 부끄러워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 Adult children of emotionally immature parents> p.18 - 린지C.깁슨





작가의 이름 '미야니시 타츠야'을 검색해보니, 같은 그림의 '공룡'이 나오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더 있어!!! 하고.

알고보니 '엄마,아빠를 울린 동화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고 녀석 맛있겠다'라는 굉장히 유명한 어린이 동화 시리즈였다!

그 뒤로도 이 시리즈를 하레와 함께 읽으며 울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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