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벤따 Sep 09. 2019

제가 샤워를 너무 자주 한다고요?

하루에 한 번 하는데요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수건을 챙겨 방 밖으로 나다. 현관문에 주인아주머니의 열쇠가 걸려있지 않은 걸 보니 집엔 나 혼자인 게 분명다. 야호!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탈의를 하고 시계를 다. 20분을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간을 다. 하나, 둘, 셋, 넷, 오케이. 사십 분까지 마쳐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주하듯이 샤워를 시작다.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는 시간이 오 분쯤 걸리므로 삼십 오분까지는 끝내야 한다!


숨 막히는 이 광경이 내 샤워 루틴이 된 것은 두 달 전부터이다. 베를린에 온 이후 세 번의 이사 끝에 마침내 친절하고 쿨한 독일 아주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이사 온 지 이틀 째 되던 날, 아주머니는 나를 불러 보일러를 보여주면서 말씀하셨다. 물을 데우려면 이 전기보일러를 써야 하는데 전기세가 비싸니 하루에 한 번만 샤워를 해달라고. 덧붙여 밤 10시 이후로는 샤워를 하지 말아달라고도 했다.


나는 원래도 하루 한 번 씻는데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여달라고 하시니 군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대체 왜 두 번 샤워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의문이었지만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면 내가 샤워를 하는지 세수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착각하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간단한 세면조차도 서둘러 끝냈다. 하루에 한 번 샤워하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여 되도록이면 신속하게, 운이 좋으면 아주머니가 안 계실 때를 틈타 거사를 치렀다.


눈치를 보던 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부엌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부엌 의자는 내 방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위치에 있어서 내가 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다른 나라에서 왔고, 문화가 다르다는 걸 알아. 하지만 물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니? 따뜻한 물을 쓰면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너는 매일 샤워를 하잖. 나는 일주일에 두 번 한단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공격적인 말투였고 매일같이 이렇게 샤워를 해오던 나에게는 갑작스러웠다. 아니, 하루에 한 번 샤워하는 게 투머치라고? 마음껏 펑펑 물을 틀어놓고 샤워해 왔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는데, 그동안 최대한 시간이고 물이고 아껴가며 샤워를 했던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니 서러웠다.


"전기세가 문제라면 혹시 찬물로 샤워하는 건 괜찮은가요?"


"세상에, 누가 찬물로 샤워를 하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내가 모욕이라도 한 듯이 아주머니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큰 소리를 쳤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해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한 뒤 방으로 들어왔다. 연일 최고기온을 경신하는 요즘 밖에서 땀을 흘리고 집에 들어오면 하루라도 안 씻고 넘어가는 건 나에겐 불가능했다. 더욱이 10시 넘어서는 샤워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셀프 통금 시간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는데 말이다. 신데렐라에게도 나보다 두 시간은 더 주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침 메신저를 주고받던 독일인 친구에게 알렸다.


나 : 아주머니가 나한테 물을 너무 많이 쓴대.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샤워하는데 나는 매일 한다고 말이야.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적어도 '샤워하는 거 가지고 치사하게 구네' 정도였다. 하지만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돌아온 답은 놀라웠다.


H(독일 북부 출신, 여) : 너 매일 샤워하니? 헐!


띵. 아주머니에게 큰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매일 샤워하는 게 어때서? 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H : 그렇지만 일주일에 두 번은 너무 심했다. 윽 좀 역겨워. 너 매일 샤워하는 거 머릿결이랑 피부에 안 좋아!


나 : 나는 매일 샤워해야 해. 그리고 심지어 여름이잖아!


H : 이틀에 한 번씩 하려고 노력해봐. 나는 항상 이틀에 한 번만 하는 걸.


세상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또 다른 독일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J야, 하루에 한 번 샤워하는 게 이상하니? 너무 자주 하는 거야?


J(독일 남부 출신, 남) : 이렇게 더운 날씨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보통 이틀에 한 번 해. 너무 자주 하는 거는 피부에 안 좋거든.


이럴 리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나는 다른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또 메시지를 보냈다.


나 : L아, 하루에 한 번 샤워하는 게 이상한 거야?


L (베를린 출신, 여): 여름에는 매일 해. 하루에 두 번 할 때도 있어. 아침에는 물로만 하고 저녁에는 비누로 하고. 하지만 보통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해. 너무 자주 하는 건 피부랑 머릿결에 안 좋거든.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샤워를 너무 자주 하는 건 피부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틀에 한 번 샤워를 하는 것이 이곳의 국룰, 아니 상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나흘에 한 번 샤워를 하는 아주머니에겐 내가 매일같이 물을 써대는 낭비쟁이인 게 당연했다.


평생을 한국 땅에서만 살았던 나는, 어느 한국인이나 다 그럴 것으로 믿지만, 하루에 한 번 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깔끔을 떤다느니, 물을 낭비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이틀에 한 번 샤워하는 게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루에 한 번 하는 것이 질타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하루에 한 번 샤워를 할 권리가 있고!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수영하기 전 샤워를 하고, 수영을 마치고 샤워하고, 일과를 마친 후 저녁에 또 샤워하고 잠들던 호시절이 떠오른다. 온탕에 들어가 땀을 흘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쯤 냉탕에 뛰어들어 몸을 식히다 보면 뼛속까지 시려 다시 온탕에 뛰어들던 개미지옥 같은 목욕탕이 그립다. 주말 아침이면 느지막이 일어나 욕조에 물을 받고 노래를 들으며 반신욕을 하던 게 꿈만 같다!


아, 샤워도 마음껏 못하는 나라에서 나는 무얼 한단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물 부족 국가, 독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