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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A Aug 28. 2015

자아정체성

나는 여전히 여기 있는데, 날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그 꿈들이 결코 단순하지 않았던지라 남들이 흔히들 말하는 '특이한 아이'에 분류되곤 했다. 그 꿈들의 종류는 대부분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워낙 광범위한 것들을 선호했던 탓에 딱 하나를 꼽는 것이 내겐 너무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몇 가지를 나열하자면 예술가, 다양한 직업을  경험해 보기, 건강하게 오래 살기, 다채로운 색을 가진 삶이었다.


그렇게 부푼 꿈을 갖던 아이는 지금 학생의 시기를 거쳐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학생 때 겪은 현실과 지금 내가 맞서고 있는 현실과의 차이의 크기는 엄청났다. 이력서를 쓸 때 기재되는 자신의 스펙을 바라볼 때의 씁쓸한 시선들도 이젠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될 것 같고, 내가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살아보려 하는데 왜 자꾸 막나. 발버둥 칠 수록 나는 점점 가라앉으니 무기력해져만 갔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주민등록증이 딸랑 한 장 나왔다고 해서 청소년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도 어색했고, 나는 여전히 어린데 1살의 나이차로 인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도 무서웠다. 학생일 때는 '안 돼'라는 얘기를 듣고 살아왔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이제 성인이니 알아서 책임져라'라는 말을 들으니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울타리 안에 있다가 시간이 다 됐으니 쫓겨난 기분이었다. 난 이제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해주었던 '어른이 들'도 결국 이 시기를 거쳤을 테지만, '어린이들'이 성숙해져 가는 그 시기를 보살펴 주지 않는다는 현실이 참 냉혹하게 다가왔다.


나이  때마다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암묵적인 규칙이 늘 존재한다. 나는 학생  때부터 이 규칙을 따르지 않았는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나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문제아'일뿐이었다. 늘 정해진 길 외에 다른 길로 나가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렇게 살아가고 싶은지. 표현을 해 봤자 모두 현실 운운을 하며 나에게 늘 적당한 선을 요구한다. 위에서 말했듯 어떠한 것에 단정 짓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사람마다의 시간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의 시간도 느릴 때도 혹은 남들보다 빠를 때도 있을 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내가 점점 커갈수록 생각이  많아질수록 나와 사람들 간의 생각 차이가 크게 느껴져만 갔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못해서 슬프고, 친구는 할 일은 많으나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몰라 슬퍼하고. 나를 제외한 그들만의 시간들을 늘 공유하고 있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었으니까.


최근 몇 년 사이에  멋모를 두려움에 떨었다. 앞으로의 나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리 개인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변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이 다채롭던 아이가 자라 현실에 치여 숨이 막힐듯한 자신을 바라볼 때 마음 한 켠이 씁쓸했다.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 막힌 내가 싫었다.


나는 느리지만, 나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나 가고픈 사람이다. 더 많은 색을 가지고 싶고. 타인의 눈치를  살피기보다 온전히 나의 길에 집중하고 싶다. 멋진 삶을 꿈꾸는 것도 결국 내가 현실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꿈꾸는 거니까. 좀 더 좋은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나'의 생각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고, 그 생각을 잘 표현해야겠다 싶었다.


'자아정체성'은 줄곧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그 생각을 청소년기에만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무기력해질 때 질문을 던지면 결국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싶은지 답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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