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의 힘

여백이 주는 선물

by 디노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엔 노트 여백이 많았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일기장 구석 한편에 낙서를 하고, 연습장에 꼬불꼬불한 줄을 그리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며 잠시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자, 여백은 점점 사라져 갔다. 손에 쥐어진 노트는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고, 그 안의 메모 앱과 일정표가 여백의 자리를 차지했다. 낙서 대신 숫자가 가득했고, 문장보다 단어들로 채워졌다.


일정표에는 자유가 없었다. 시간은 빽빽했고, 틈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상상력은 결국 짐을 싸서 떠났다.




상상력은 원래 그런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오지도,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다. 어느 날 훌쩍 떠났다가 또 어느 날 불쑥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상상력이 회사를 ‘퇴사’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이곳은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트의 여백을 좋아하는 상상력은 일정표만 바라보는 내가 불만이었을 것이다. 노트의 여백, 삶의 틈새. 그동안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한때 유럽을 여행하며 파리의 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던 순간이 가끔 떠오른다. 그저 멍하니 앞에 있던 새들을 바라보았을 뿐, 어떤 계획도, 목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이 오히려 내 여행의 빈틈을 조용히 채워주었다.


그런 여백의 시간 속에서 상상력은 나에게 찾아왔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내 곁에 조용히 앉았고, 우리는 함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일정표는 내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떠오르면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일정을 기록한다.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 잊지 말고 사야 할 물건, 가족과의 약속까지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생각을 메모장에 적어보는 것은 내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다. 펜을 들어 손글씨를 써보고, 새로 산 책의 첫 장을 조심스레 넘겨보는 일. 그 시간들은 겉보기엔 아무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진짜 내가 숨 쉰다.

서두름도, 점수도, 평가도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나만의 노트 여백이다.




퇴사한 상상력은 자신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밀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를 ‘쓸모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효율과 생산성만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꼭 효율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표와 싸우며 산다. 하지만 모든 삶이 시간표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가끔은 정류장에서 그냥 두 정거장을 더 가보는 것,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걷는 것, 평소 듣지 않던 음악을 듣는 것. 그 모든 여백 속에서 퇴사한 상상력이 다시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