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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Aug 25. 2022

스며들다



별다른 약속 없이 퇴근하는 주말.

건물을 나서니 바로 집으로 가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하늘이 너무 예쁘다.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연락해 볼까도 싶지만

이미 퇴근하고 나와 버린 길.

친구가 갑작스러운 만남에 응한다 해도 어디에서 만날지 정하고,

준비하고 나오기까지 난 어디에서 기다리지? 생각하면 또 쉽지가 않다.

(예전이라면 맥주를 마시며 기다렸겠지만 요즘의 체력은..?)



갑자기 누군가 만나기 살짝 부담스럽고

소위 '힙플'에 혼자 찾아가기도 싫고.

그러면서도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의미 있게 놀고 싶은 날.



이럴 때 답은 정해져 있다.

포털을 켜고 '전시회'를 검색하는 것.

그나마도 어디를 가야 할지 잘 모르겠으면 더 쉽게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이 세 곳 중 하나를 선택하는 편이다.

한 번만 환승하면 쉽게 도착하는 곳을 고른다.

낯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퇴근길마다 듣는 음악이 따로 있다.

아큐라디오 어플을 켜고 콰르텟 카테고리를 누른다.



멍하니 밖을 보면서 전시회 관람 전 식사를 먼저 하는 게 좋겠지 생각한다.




당신의 취향이 나에게 스며들다

팝이나 케이팝 아니면 확고하게 '안 듣는' 주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재즈를 듣기 시작했고

요즘은 클래식도 듣는다.

선호하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재즈라디오, 아큐라디오 어플에서 장르를 선택하는 정도.

오, 요즘 유행이라는 아비투스 업그레이드 과정?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언젠가 친한 과 동기 언니가

'사람 목소리가 들리면 공부할 때 집중이 안 돼서 클래식을 듣는다'

고 스쳐가듯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퇴근길 그저 눈 감고 조용히 가고 싶을 때,

그런데 주변의 소음에서는 나를 살짝 분리해 두고 싶을 때,

그 말이 문득 생각나서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에는 이 음악도 록사운드였겠지. 지금은 퇴근 음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명 교향곡들이 다수 포진된 클래식 top 100을 듣다가

피로한 귀에 너무 사운드가 풍부한 느낌이라 4인조 콰르텟으로 주된 카테고리를 바꿨다.

그 언니도 계속 클래식을 듣고 있을까?

언니 덕에 난 듣는 범위가 더 넓어졌는데.

그래도 이것 때문에 연락하긴 쑥스럽다.

언젠가 동창회에서 마주치면 꼭 말해 주어야지 다짐한다.



재즈도, 음악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이 나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취향을 전해 주었다.

친구 손을 잡고 훌쩍 들어가 본 다른 세계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그들에 대한 내 애정의 크기만큼 편안했으리라 생각한다.




스며든 취향의 발향(發香)

'정말정말 한가한 날은 전시회장에 간다'라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함께 갔던 전시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오히려 그때 전해 준 취향은 나의 새로운 습관으로 남았다.



당연하게 오디오 도슨트를 결제한다.

이건 새롭게 발향하는 나만의 취향이다.

취향을 전해 준 친구는 작품을 일대일로 마주하며 그저 느끼는 편이었지만

나는 방법이 있는데도 애써 겉돌며 절반만 겨우 이해하고 돌아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슨트 내용을 기억하려 애써 보기도 했지만 이제 그러지는 않는다.

다만 들을 때 나름대로 집중해서,

여러 작품 중 신중하게 골라 가이드를 녹음했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며

그 순간에 최대한 받아들이려 하는 편이다.

수업 듣듯이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편이니 짧을수록 더 좋기는 하겠지.



취향이 개인을 특별하게 해 준다고 말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나에게 취향은 세계의 확장이다.

취향이 하나 둘 생기면서 나는 특별한 누군가가 되기보다는

세상을 보다 넓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을 가면 그 곳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에 꼭 올라가는 습관이 생긴 것도

날씨 좋은 가을 저녁에는 꼭 산책을 해야 하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브런치에 도전하여 줄글을 세상에 남기게 된 것도

누군가가 전해 준 취향들이다.



올해 여름에는 스쿠버다이빙에 새롭게 도전했다.

아직 온전히 내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다시 도전해 볼 만큼 즐거운 경험이었다.

영상 속 어설프게 물 속을 떠다니는 나를 보며

문득 나는 어떤 취향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궁금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부분이 이제 나를 구성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무언가 전했을 것이다.


모쪼록 스며들어 간 나의 일부가 멋지게 발향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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