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나 술자리에서의 두서없는 토막 잡썰(雜說) ⓼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이었다.
당시 허균은 33살, 매창은 29살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였다. 그해 7월, 허균은 세곡(稅穀)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감독하는 해운판관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였다. 이는 지방 수령이 되는 것과 함께 허균이 원하고 좋아하는 관직이었다. 생각해 보면, 문학적 풍류가 넘쳐나고, 자유분방할 뿐 아니라 서얼이나 천민 계층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허균의 캐릭터와도 제법 어울리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호남지역은 불과 몇 달 전에 다녀간 곳이었다.
그해 봄에 허균은 호남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과거를 베풀고 감독하는 시관이 되었다. 호남의 고을들을 돌아다니며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그들의 문장을 심사하는 일은 천재적 문장가 허균에게는 안성맞춤인 업무였다. 웃으면서 신나게 평가하고 있는 허균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더구나 저녁에는 그 고을 수령에게 풍성한 대접을 받으니, 그만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일이 끝나자마자 해운판관이 되어 다시 왔으니, 남쪽으로 향하는 허균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
그러나 허균은 이 좋은 관직 또한 오래하지 못했다.
이때는 파직이 아니라 추천 때문이었다. 그해 11월 원접사 이정구가 허균을 제술관으로 천거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정구는 선조에게 “연소한 사람 중에 해운판관 허균은 시에 능할 뿐 아니라, 성품도 총민하며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를 아울러 이르는 말) 및 중국에 대해 많이 압니다”라며 허균을 천거했다. 이는 허균에 대한 품평 중 드물게 보는 긍정적 품평이었다.
여하튼 해운판관이 된 그달 23일에 허균은 전북 부안에 도착했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창이 허균 앞에 와서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었다. 빗소리와 거문고와 시 읊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한데, 예나 지금이나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둘은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졌다. 그러나 매창은 기생이었지만 허균과 가깝게 지내던 이귀의 정인이었다. 이귀는 김제군수로 있을 때 매창과 연을 맺었고, 허균이 오기 몇 달 전에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매창은 조카딸을 허균의 방으로 들여보내 대신 수청을 들게 했다. 불과 2년 전인 황해도도사 시절, 한양의 기생을 데려와 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될 만큼 자유분방한 허균이지만, 가릴 건 가려야 했다. 어쩌면 오래 서로 시를 주고받고 싶은 마음이 그의 본능을 억눌렀을지도 모른다.
매창의 원명은 이향금이고 매창은 호다.
부안 아전인 이탕종의 서녀로, 계해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계생, 혹은 계랑이라고 불렀다. 시 짓는 솜씨가 뛰어나 남도의 황진이라고도 했다. 허균은 그녀를 계생으로 불렀다. 역사 속 인물 중에 그녀의 정인으로 언급되는 사람이 세 명 있다. 그녀를 만난 순서대로 보면, 유희경, 이귀, 허균이다. 이들의 삶은 서로 꽤 거리가 있었다. 유희경은 천민 출신 시인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문사였고, 이귀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한 세월을 풍미했으며, 허균은 광해군 시절 잘나가던 관료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중 매창이 평생 정인으로 사랑한 사람은 유희경이었다.
유희경이 46살에 매창을 처음 만났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18살이었다. 둘은 나이를 초월해 시를 매개로 깊이 사귀었다. 그러던 중 유희경이 한양으로 떠나고 좀 지나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유희경은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그 공으로 면천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도 둘은 만나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둘은 허균이 다녀가고도 한참이 지난 1607년에 잠깐 재회한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매창은 1610년에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지금은 부안읍 남쪽에 거문고와 함께 묻혀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그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죽은 후 60년 정도 지나자, 고을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매창집』을 변산의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시집이 출간되자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찾았다. 그래서 매창의 시집을 찍어내느라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났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부안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했다.
부안에 가면 매창공원이 있고, 시비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랜 기다림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매창이 유희경을 생각하며 쓴 시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러고 보면 매창의 연애운은 그다지 잘 풀린 것 같지는 않다.
옆 동네 지방관으로 왔던 관리는 인사발령이 나서 떠나고는 연락이 없고, 출장 왔던 공무원은 한양으로 돌아가더니 몇 년 만에 편지나 보내와 투정이나 부리고, 어린 나이에 정을 준 늙은 애인은 15년이 더 지나서야 잠깐 얼굴만 스칠 뿐이었다. 당시 기생의 삶에서 박복하지 않은 연애가 어디 있겠냐마는, 400년 후의 늙은 후배의 괜한 상념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겠다. 모르긴 몰라도, 허균과 유희경은 그녀의 시향(詩香)과 거문고 소리를 평생 그리워했을 것이다. 매창과의 짧은 만남 후 긴 시간이 흐른 뒤, 허균이 매창에게 쓴 편지에는 둘 간의 사랑과 우정 사이의 번민이 잘 드러난다.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10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느냐.” 허균의 고백처럼 둘은 끝내 사랑이라는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고, 정신적 연인으로서 교감을 나눈 듯하다. 분출해버린 사랑은 언젠가 끝날 운명을 안고 있기 십상이지만, 우정은 쉬이 그 끝을 가늠하지 않는 법이다. 끝나버린 사랑을 붙잡고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다. 둘의 사귐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