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장날. 엄마의 믹서기가 김칫소에 들어갈 자잘한 생새우를 갈다 갑자기 멈춰버렸다. 얼마 전에도 이래서 수리비를 내고 고쳐왔는데 또 고장이 나면 어쩌냐며 엄마는 화를 냈다. 딱딱한 것도 아니고 이깟 새우를 갈다 멈춰버렸다는 사실이 엄마를 더 화나게 했다. 믹서기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김장날 고장 날 게 뭐람. 급한 대로 새우는 마늘 커터기에 갈고 배는 강판에 갈고, 믹서기가 고장 나니 갑자기 여러 사람이 바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집에서 몇 년째 놀고 있는 믹서기라도 가져올걸.
그 순간 떠오른 생각. 우리집 믹서기는 엄마의 믹서기에 비하면 정말 얼마나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고장이 났을지도 모르는 우리집 믹서기. 신혼 초에 구매해서 지난 팔 년 간 열 번? (아니 아니) 다섯 번 정도 썼으려나? 우리집 믹서기 팔자에 비하면 엄마의 믹서기 팔자는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다. 김장날 파업을 택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흔히들 전자 제품을 살 때 뽑기를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주인만 뽑기를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믹서기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고생을 덜 하고 살려면…
그래서, 그동안 주인 잘 만나 편하게 살았던 우리집 믹서기를 친정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이 산 거라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 정이 안 가던 물건인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번쩍. 훗날 언젠가 믹서기가 필요한 날이 오면 그때 다시 사야지, 예.쁜.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