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 전세가 안 빠져서 두 달가량 빈 집 상태였다.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대출 이자까지 이래저래 골칫거리였는데, 드디어 세입자가 나타났다. 앓던 이가 빠진 격이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하루종일 기분이 시무룩하다. 기분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오전에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가 왔다. 계약 만기일을 지키지 못했으니 중개 수수료는 우리가 부담하라는 게 집주인의 입장임을 전해주었다. 계약 종료일까지 두어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돈을 모두 지불하려니 불쑥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계약 종료 석 달 전부터는 중개 수수료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하니, 그게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 상호 협의 간에 이루어지는 건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임차인이 부담한다고 했다. 잠시 전화를 끊고 남편과 상의했는데, 물러터진 그와 나는 ’어쩔 수 없지 뭐‘하는 결론을 내리고 수수료를 부담하겠노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내게 종료 석 달 전부터는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부동산 지식을 알려 준 사돈어른이 등장하게 된다. 조언을 얻고자 (부모님이 부동산을 운영하시는) 올케에게 전화를 한 게 화근이었다. 사돈어른께서는 ’무슨 소리냐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된다 그 부동산 번호를 내게 넘겨라‘ 하셨고, 나는 순진하고 눈치 없는 척 올케에게 부동산 번호를 일러주었다.
사돈어른께서는 부동산과 통화해 부산 사람답게 아주 화끈하고 호탕하게, 다 알면서 왜 그러시냐, 우리 조카딸은 한 푼도 낼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으셨다고 했다. (나는 졸지에 사돈어른의 조카딸이 되었다.) 그러고 앞으로는 사돈어른께서 직접 부동산과 소통할 테니 나는 부동산의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하셨고, 당장 집 비밀번호를 바꾸고 절대 열쇠를 넘겨주면 안 된다는 조언까지 덧붙여주셨다.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한 푼도 안 내게 해 줄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는데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잘 좀 부탁드린다고 미리부터 감사 인사를 건네놓고, 계약이 성사될 상활이 되니 중개 수수료가 아까워 발뺌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열심히 발 벗고 나서 세입자 구해놓았더니, 임대인과 임차인 둘 다 돈 안 주려고 내빼는 상황에서 본인의 중개 수수료를 받기 위해 중간에 끼어 애쓰는 중개인의 구차한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까지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 사돈어른을 동종업계 종사자를 사지로 몰아세우는 악덕한 어른으로 만드는 것 같아 그것마저 불편했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물러터진 나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사돈어른)는 수수료를 안 내도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좋게 마무리하고 싶으니 조율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우리가 내야 할 수수료의 절반 가량, 30만 원을 지불하는 것으로 협의를 봤다. 아마 우리 엄마와 사돈어른께서 아시면 노발대발 난리가 날 것이지만, 나는 돈을 써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전 집에서 5년 8개월을 살았다. 이사했을 당시 18개월이던 첫째가 커서 초등학생이 되었고, 둘째가 태어나 유치원생이 되었다. 예쁜 추억들이 가득한 고마운 집에 안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무탈하고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안 써도 될?) 30만 원을 썼고, 그 돈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지만 평화를 얻는 것은 실패했다.
나는 왜 이렇게 물러터진 사람인가부터 시작해서, 역시 나는 평생 부자는 될 수 없겠구나까지. 불필요한 자괴감에 휩싸인 하루였다. 대신, 평화는 얻지 못했지만 교훈은 얻었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오면 꼭, 계약서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와 관련한 특약 조항을 넣어야겠다는 인생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