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에 와서 배우는 영어
중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어려움과 답답함이 있다. 어른인 내가 겪는 불편함은 기껏해야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주문할 때 정도인데, 그마저도 번역기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경우가 다르다.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오후 네 시 반까지, 무려 아홉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심지어 이동 시간 한 시간마저 중국 선생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니 아이들이 언어 때문에 답답함을 겪는 시간은 하루에 열 시간인 셈이다. 나였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데 아이들은 굉장히 의연하고 씩씩하다. (그래서 정말 고맙다.)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국제학교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 만 4세 시안이는 매일 하교 후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엄마, ‘유캔두이’가 뭐야? 아까 내가 뭐 하는데 친구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어설픈 발음이지만 그래서 더 귀여운 시안이의 영어. 시안이가 배워오는 영어는 진짜다. 매일 어떤 상황과 문장을 하나둘씩 기억해 오는데 그게 정말 기특하다. ”히어가 뭐야?“, ”씻 다운이 뭐야?“, ”룩 앳 미가 뭐야?“, ”비 케어 포가 뭐야?“ 고슴도치 같은 말이지만, 시안이는 정말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어떻게 처음 듣는 말을 하교 후까지 잊지 않고 기억했다 전달하는 건지 들을 때마다 매번 신기하다.
반면, 중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한 만 7세 재이의 영어는 조금 짠하다. 한국에서 재이는 숲 유치원에 다니며 2년 간 삽질 조기 교육을 받았고(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이야기), 그나마 작년에 일반 어린이집으로 옮기면서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다 갑자기 중국행이 결정되고, 국제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돼서 부랴부랴 영어를 시작했지만 일주일에 2번, 놀이식 영어 학원을 다닌 게 재이의 영어 학습의 전부였다. 영어 가방끈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눈치껏 파닉스를 익힌 덕분에, 문장을 더듬더듬 읽어 볼 시도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국제학교는 IB 커리큘럼을 따르는데 초등 1학년 때 파닉스를 배우고, 2학년은 바로 문장을 배운다.
학교에서 재이처럼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별도로 모아 일주일에 두 번 EAL 수업을 진행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좀 감동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신다니! 그런데 재이가 처음으로 EAL 수업을 듣고 받아 온 숙제를 보고는 좀 크게 놀랐다. 앗, 이건 재이가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데… 하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으니 따르는 수밖에. EAL 수업 중에 사진을 두 장 주고 제시된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드는 훈련을 한다. (재이의 경우 처음에는 칠판을 보고 그대로 적어 오기도 바쁜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그것과 비슷한 사진을 두 장 더 주시는데 그게 바로 숙제다. 몇 주간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처음 EAL 숙제를 할 때는 이게 맞나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빠와 숙제를 하는 날이면 재이는 삐질삐질 울기도 했다. 삐죽거리는 모습이 마음이 아파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아이들이 집에 오면 숙제부터 시키곤 했는데, 내가 가르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애가 얼마나 고생이고 얼마나 힘들지 다 이해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빨리 터득해야 학교 가서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단호해졌다.
3주쯤 됐을 때, 숙제를 하다 재이의 눈빛이 빛나는 게 느껴졌다. ”재이야 너 영어 재밌지? 어려운데 재밌지?“하고 물으니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Some students raise up their hand.
“엄마, 근데 hand에도 s 붙여야 하지 않아?”
와, 이 순간 느꼈던 희열. 고슴도치라 놀려도 어쩔 수 없다. 실로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단수, 복수의 개념을 익히고 나니 ‘궁금증’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복수에는 s를 붙이는데, 왜 여기는 안 붙였는지를 재이의 눈높이에 맞춰 친절한 언어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내가 좋았다. (옛날 옛날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중학생들 영어 가르치며 쌓아 온 시간이 이렇게 빛을 발하다니 엉엉)
아이들이 국제학교에 다닌 지 5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의 체감으로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지만, 학교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만 너무 기특한 건, 활동 사진을 보면 시안이는 늘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고, 담임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재이는 샤이 가이에서 펀 가이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이들 사교성만큼은 대문자 ‘E’인 아빠를 닮은 것 같다. 나를 닮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쩜 두 녀석 모두 학교 가기 싫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심지어 주말이면 빨리 학교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면 너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 힘들 텐데, 힘든 게 있을 텐데 표현을 안 하는 건 아닐까. 무탈한 상태가 지속되니 자꾸만 불안감이 싹트려고 하지만,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하는 나와 달리 우리집 박씨들은 정말 단순한 사람들이니까, 그 단순함을 믿어 본다. 정말 괜찮은 거라고. 진짜 재밌는 거라고.
아이들이 씩씩하게 잘 지내주는 게 제일 고맙다. 재이와 시안이가 낯선 곳에 와서 매일매일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 행복도 야금야금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