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씩씩 Sep 21. 2024

엄마, ‘유캔두이’가 뭐야?

국제학교에 와서 배우는 영어

  중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어려움과 답답함이 있다. 어른인 내가 겪는 불편함은 기껏해야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주문할 때 정도인데, 그마저도 번역기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경우가 다르다.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오후 네 시 반까지, 무려 아홉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심지어 이동 시간 한 시간마저 중국 선생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니 아이들이 언어 때문에 답답함을 겪는 시간은 하루에 열 시간인 셈이다. 나였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데 아이들은 굉장히 의연하고 씩씩하다. (그래서 정말 고맙다.)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국제학교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 만 4세 시안이는 매일 하교 후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엄마, ‘유캔두이’가 뭐야? 아까 내가 뭐 하는데 친구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어설픈 발음이지만 그래서 더 귀여운 시안이의 영어. 시안이가 배워오는 영어는 진짜다. 매일 어떤 상황과 문장을 하나둘씩 기억해 오는데 그게 정말 기특하다. ”히어가 뭐야?“, ”씻 다운이 뭐야?“, ”룩 앳 미가 뭐야?“, ”비 케어 포가 뭐야?“ 고슴도치 같은 말이지만, 시안이는 정말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어떻게 처음 듣는 말을 하교 후까지 잊지 않고 기억했다 전달하는 건지 들을 때마다 매번 신기하다.




  반면, 중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한 만 7세 재이의 영어는 조금 짠하다. 한국에서 재이는 숲 유치원에 다니며 2년 간 삽질 조기 교육을 받았고(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이야기), 그나마 작년에 일반 어린이집으로 옮기면서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다 갑자기 중국행이 결정되고, 국제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돼서 부랴부랴 영어를 시작했지만 일주일에 2번, 놀이식 영어 학원을 다닌 게 재이의 영어 학습의 전부였다. 영어 가방끈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눈치껏 파닉스를 익힌 덕분에, 문장을 더듬더듬 읽어 볼 시도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국제학교는 IB 커리큘럼을 따르는데 초등 1학년 때 파닉스를 배우고, 2학년은 바로 문장을 배운다.


  학교에서 재이처럼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별도로 모아 일주일에 두 번 EAL 수업을 진행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좀 감동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신다니! 그런데 재이가 처음으로 EAL 수업을 듣고 받아 온 숙제를 보고는 좀 크게 놀랐다. 앗, 이건 재이가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데… 하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으니 따르는 수밖에. EAL 수업 중에 사진을 두 장 주고 제시된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드는 훈련을 한다. (재이의 경우 처음에는 칠판을 보고 그대로 적어 오기도 바쁜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그것과 비슷한 사진을 두 장 더 주시는데 그게 바로 숙제다. 몇 주간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처음 EAL 숙제를 할 때는 이게 맞나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빠와 숙제를 하는 날이면 재이는 삐질삐질 울기도 했다. 삐죽거리는 모습이 마음이 아파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아이들이 집에 오면 숙제부터 시키곤 했는데, 내가 가르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애가 얼마나 고생이고 얼마나 힘들지 다 이해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빨리 터득해야 학교 가서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단호해졌다.


  3주쯤 됐을 때, 숙제를 하다 재이의 눈빛이 빛나는 게 느껴졌다. ”재이야 너 영어 재밌지? 어려운데 재밌지?“하고 물으니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Some students raise up their hand.

“엄마, 근데 hand에도 s 붙여야 하지 않아?”


  와, 이 순간 느꼈던 희열. 고슴도치라 놀려도 어쩔 수 없다. 실로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단수, 복수의 개념을 익히고 나니 ‘궁금증’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복수에는 s를 붙이는데, 왜 여기는 안 붙였는지를 재이의 눈높이에 맞춰 친절한 언어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내가 좋았다. (옛날 옛날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중학생들 영어 가르치며 쌓아 온 시간이 이렇게 빛을 발하다니 엉엉)



  아이들이 국제학교에 다닌 지 5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의 체감으로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지만, 학교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만 너무 기특한 건, 활동 사진을 보면 시안이는 늘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고, 담임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재이는 샤이 가이에서 펀 가이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이들 사교성만큼은 대문자 ‘E’인 아빠를 닮은 것 같다. 나를 닮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쩜 두 녀석 모두 학교 가기 싫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심지어 주말이면 빨리 학교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면 너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 힘들 텐데, 힘든 게 있을 텐데 표현을 안 하는 건 아닐까. 무탈한 상태가 지속되니 자꾸만 불안감이 싹트려고 하지만,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하는 나와 달리 우리집 박씨들은 정말 단순한 사람들이니까, 그 단순함을 믿어 본다. 정말 괜찮은 거라고. 진짜 재밌는 거라고.


  아이들이 씩씩하게 잘 지내주는 게 제일 고맙다. 재이와 시안이가 낯선 곳에 와서 매일매일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 행복도 야금야금 자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