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싸우느라 바빴던, 2024년 10월
중국 국경절 연휴에 맞춰 9박 10일 간 한국에 가기로 했다. 뜨거운 여름, 중국에 와서 지내는 동안 내가 버틸 수 있도록 위태로운 마음을 붙잡아 주었던 ‘한국 가는 날’. 급하게 중국에 오느라 한국 생활을 정리하지 못해서 짐을 정리하러 가는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한국에 가는 날이 이 여행의 끝이라도 되는 듯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9월 28일 토요일 아침. 정저우 공항에서 큰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작은 아이의 담임 선생님 가족을 비롯해서 아이들의 국제 학교 친구들까지, 연휴를 맞아 한국 여행을 가는 가족들을 많이 만났다. 살면서 같은 비행기에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탄 적은 처음이라 들뜬 마음이 한층 더 둥실둥실,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인천 공항에 마중 나와주신 아버님 얼굴을 보는 순간, 익숙한 반가움이 행복이 되어 번졌다. 아버님 차를 타고 공항에서 시댁으로 이동하는데, 거리 표지판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 열흘 동안, 이곳에서는 무슨 문제가 생기든 내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니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단 사실이 두 달 동안 꼭 움츠려 있던 마음을 당당하게 펴주는 것만 같았다.
시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드디어 우리 집. 세종에 왔다. 짐 정리와 이사가 주된 목적이지만, 한국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아이들은 전과 같은 일상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한국도 임시 공휴일과 개천절, 재량 휴교까지 더해져 쉬는 날이 많은 주간이라 아이들이 친구들과 원 없이 놀 수 있었다. 초반에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들과 수다도 떨고 나 역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누렸으나, 매일 새벽까지 짐 정리를 해도 시간이 부족해서 염치 불고하고 아이들만 친구네 집에 맡겼다. (이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친구 어머니들의 도움이 8할이다. 이 은혜를 꼭 잊지 말아야지!)
분명 5월에 이사를 하며 짐 정리를 한 번 했고, 7월에 중국에 가기 전에도 정리를 좀 했는데도, 국제 이사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상 밖의 일이었던 터라 암담한 순간들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국내 이사는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든 챙기기만 하면 되는데, 버릴지 말지 고민이 되는 물건들도 일단 챙겨두면 어떻게든 되는데, 이건 뭐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나만 바라보고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 방 한 칸을 내어주셔서 꼭 필요한 물건은 친정에 맡기고 갈 수 있어서 그나마 좀 나았지만, 그간 내가 쓰던 살림들을 내 손으로 처분하는 일이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어 곧 필요한 옷가지들과 택배로 보낼 수 없는 소형 가전은 수화물로 챙기고, 천천히 받아도 되는 물건들은 택배로 부치고,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은 친정으로, 친정에 맡길 수 없는 물건들은 당근을 할지 나눔을 할지 폐기물로 버릴지, 집을 비우느라 일주일 동안 일 년치의 에너지를 다 쓴 것 같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한 주였다.
무사히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간 내에 짐을 다 챙길 수 있을까, 짐을 싸는 내내 걱정했는데 결국 해냈다. 중국으로 보낼 짐들은 택배로 아홉 상자, 수화물로 가져갈 짐은 28인치 캐리어 두 개와 이민 가방 두 개. 짐을 다 꾸렸으니 이제부터는 진짜가 시작되겠지. 정저우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어두운 새벽, 자꾸만 깊은 한숨이 서글픈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10월 7일 월요일 아침. 4인 가족 수화물의 최대치를 꾹꾹 채워 다시 정저우로 돌아왔다. 짐을 싸는 건 힘들었는데, 푸는 건 금방이었다. 집에 돌아와 짐 정리를 마치고 보니, 필요한 것들이 채워져 생활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여름 내내 야금야금 사 두었던 신간들도 가져와 읽고, 뜨개 용품도 가져와 밀린 드라마 보며 뜨개도 하고, HSK 책 사 와서 중국어 공부도 하고, 야심차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오래가지 않아 마음에 탈이 났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어 자주 눈물이 났다. 잘 지낸다고 생각했지만, 만나는 이들 모두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니었다. 괜찮지 않았다. 외로웠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워낙에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집에 있고 싶어서 집에 있는 것과 집에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집에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여름에 왔을 때는 모든 게 새로워 약간은 여행하는 기분으로 지내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자리 잡는 시기라 뭘 하든 시큰둥했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왔다.
해외 살이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나는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만이고 착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외로워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었다. 엄마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가라앉는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때만 흐르던 눈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다. 내가 울고 있으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마음 놓고 울 수조차 없는 원룸 생활마저 지긋지긋했다.
우울감에 빠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는 와중에도 성실한 생활을 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킨 뒤 단지 내 산책을 하고, 모닝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며 뜨개를 하고, 점심을 챙겨 먹고, 중국어 공부를 하고, 다시 또 책을 읽고. 이 생활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꾸역꾸역 열심히 살기 위해 힘을 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엔 하루종일 뜨개만 하고, 또 어느 날엔 하루종일 드라마만 봤다. 사실 그래도 되는데, 그래도 아무 문제없는데, 열심히 살고 싶고 시간을 성실히 쓰고 싶은 내 욕심이 문제였다. 이렇게 마음이 괜찮지 않을 때에는 좀 대충 살아도 되는데,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했던 게 나를 더 힘들 게 한 것 같다.
며칠을 대충 살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힘들면 힘든 대로,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내 감정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다시 털고 일어설 힘이 생겼다. 그 힘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침에 아이들 등교시키고 한 바퀴, 오후에 아이들 하교하기 전에 다시 또 한 바퀴. 차가운 공기가 들어가면 몸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지나간 시간 속의 내가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땀을 흘리는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무기력한 마음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11월이다. 오늘의 나는 잘 지내고 있지만, 내일의 나는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잘 지내는 게 정상이 아니라 괜찮지 않은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의 생활은 괜찮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잘 지내고 있는 오늘이 감사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 느슨한 마음으로, 너무 애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늘의 무사를 감사하면서.